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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치노매드 Sep 16. 2022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의료기기

feat. 저도 알고 들어간 건...

7학기가 끝났다. 본격적인 취업 준비 시즌이다.


여름방학은 토익 공부와 취업스터디가 국룰이었던 시기, 나는 용감하게 혹은 미련하게 스페인의 한 대학으로 교환학생을 신청했다. 취업을 할지 공부를 계속할지 고민의 답을 찾겠다며 홀연히 떠났다. 여느 때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까지 걷고 난 뒤, 나는 조용히 돌아와 남들 다하는 토익 공부를 시작하고 취업스터디에 뒤늦게 합류했다.


8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졸업 예정자들을 위해 학기 내내 여러 취업 강좌를 열었다. 나는 과감히 모의 면접을 신청했고 200명 정도 들어가는 대형 강의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면접관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복장까지 갖춰 입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으로 올라가 좌석에 앉았다.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면접관의 말에 이렇게 입을 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이치입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습니다.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기에 어떤 분야에서도 널리 활용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학부 때 배웠던 기본기를 바탕으로 저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에 적응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수학은…”


말이 점점 꼬여갔다. 수학을 전공한 나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하다 보니 수학 예찬론자가 되어 있었다. 내 대답을 듣고 있던 취업지원팀 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학부생 몇몇은 킥킥거렸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취업게시판을 들락거리던 어느 날, 눈에 띄는 채용공고가 있었다. 담당 직무란에는 세상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사회 초년생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달콤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직무]

- 시장의 니즈를 파악하고 분석하여 고객에게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한다
- 고객을 효율적으로 서포트한다
- 회사의 자원을 활용하거나 필요하다면 스스로 솔루션을 만들어 낸다
- 팀과 상의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제안한다


[자격요건]

- 평소 논리적이며 문제 해결을 좋아하는 사람
- 스스로 동기 부여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
-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빠른 사람
-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는 사람
- 고객 앞에서 효과적인 발표를 할 수 있는 사람


지원하는 회사는 외국계라서 채용공고가 모두 영어로 쓰여 있었다. 한 줄 한 줄 해석하며 읽는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직무와 자격요건을 읽으며 이미 마음을 빼앗겨 버린 나는 두말할 필요 없이 바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잡 타이틀도 ‘Product Specialist’라니. 바로 이거야, 내가 찾고 있던 직무야.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지원서를 썼다.


회사는 국문 이력서가 아닌 영문 이력서를 요구했다. 정해진 양식은 별도로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학교에서 마련해준 영문 이력서 작성하는 법 강의를 들으며 이력서의 틀을 잡아갔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끝에 노력이 가상한 한 페이지 짜리 이력서가 만들어졌다. 워드로 작성한 파일을 PDF로 바꾸고 마감일 며칠을 앞두고 부랴부랴 지원서를 접수했다.


내가 지원한 회사는 일반 사람들에게 로션으로 잘 알려진 회사였다. 아마 대한민국 사람 한 번쯤은 발라봤을 것 같은데... 입사하게 된다면 로션 관련 업무를 맡게 되겠지 싶었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여 솔루션을 제공한다니. 얼마나 신나고 재밌을까. 마음이 설렜다.


아참, 그러고 보니 회사 이름이 ‘메디칼’로 끝났는데... 그럼 로션 말고 구강청정제를 판매하는 곳인가? 회사 정보를 찾아보니 판매하는 제품 중에 가글 이런 쪽도 있던데. 뭐 어쨌든 합격하고 차차 생각해도 되겠지. 제발 인터뷰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으면.




오래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는 서류 전형을 통과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정말? 내가? 진짜?


그때부터 회사에 대해 빠르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 여기는 로션을 파는 회사가 아니네? 의료기기라고? 그게 뭐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수술 중 쓰이는 제품이라고. 수술도구네 그럼? 매스나 거즈 같은 건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가진 의학지식은 메디컬 드라마 ‘종합병원’에서 봤던 장면들 뿐이었다. (90년대 인기 드라마 ㅡ.ㅠ )


면접에서는 다행히(?) 수술이나 제품 관련된 질문은 없었다. 그저 이력서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해왔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초점을 둔 질문들이 많았다. 4명의 면접관과 4명의 지원자가 한 시간 가량 함께했는데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았고 예정된 시간을 조금 넘기며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 면접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면접관 한 명이 슬며시 물었다. "그런데 레이치씨, 수술 참관하면 피를 보게 될 수도 있는데 괜찮은가요?"


2차 면접은 field visit이라 불렀는데 회사 분과 (아마도 선배가 될 사람) 함께 수술을 참관하며 입사 후 담당하게 될 업무를 체험해보는 것이었다.


"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답정너였다.


돌아오는 길에 살짝 걱정은 되었지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켜보기만 하는 거랬잖아. 설마 뭘 시키진 않겠지?


그다음 주에 바로 2차 면접이 잡혔다. 대학병원 로비에서 회사 분을 만났다. 조용히 하고 물건 등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일반적인 주의를 주고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가 간 곳은 수술실은 아니었고 밖에서 수술을 모니터 할 수 있는 조정실이었다. 회사 분은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들과 가벼운 인사를 하고 초록색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 역시 수술복을 입고 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 수술대에 누운 환자를 앞에 두고 수술을 시작했다. 회사 분과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주고받았다. 그렇게 4시간이 흘렀다. 나는 선 채로 망부석이 되는 체험을 했다. 정말 인상 깊었던 것은 그동안 의사 선생님이나 회사 분이나 미동도 없이 집중했다는 사실이었다. 땀을 어찌나 흘리던지.. 등까지 흠뻑 젖은 수술복은 초록색에서 남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수술이 마무리되었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인사를 하고 수술실을 나왔다. 인근 카페에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2차 면접을 정리하는데 회사 분이 가볍게 얘기했다. "오늘은 정말 빨리 끝났네요. 레이치씨 덕분인가 봐요."


'네? 4시간이요? 숨도 안 쉬고 수술했는데요?'라는 말이 턱밑까지 나왔지만 음료수를 삼키며 다시 넣었다.


"궁금한 점이 있나요?" 회사 분이 내게 물었다.

"네.. Product Specialist는 의사 선생님이 수술 중 제품을 잘 사용하시도록 서포트하는 게 주된 업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근데 저희 제품이 어디 있나요?"

"아, 우리 제품은 카테터라는 건데 의사 선생님이 환자를 치료하면서 사용하셨어요. 레이치씨는 조정실에서 뒷모습만 봐서 몰랐겠네요. 그리고 우리가 본 건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에요. 내과적 수술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내과적 수술이라고? 수술은 외과에서 하는 거 아닌가?' 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카테터(Catheter, 도관). 대충 이렇게들 생겼음. 관 내부가 비어 있어 용액이나 더 작은 의료기기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옮겨줌. (출처: 위키피디아)



2차 면접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다음으로 진행된 사장님 면접에서도 준비된 신입 사원의 패기를 열심히 보였고 최종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입사 날, 같이 면접을 보았던 남자 2명을 다시 만났다. 모두 일찍 와서 대기실에서 앉아 있었다. 면접 뒷얘기를 하며 긴장을 풀고 있는데 입사동기 남자가 말했다. "같이 면접 보았던 다른 여자분은 수술 참관 들어갔는데 피가 쏟아지는 걸 보고 주저앉았데요. 그래서 지원 포기했다나 뭐래나..."


열정이 가득하고 수술 참관도 이겨냈던(?) 나는 따스한 봄기운이 돌던 3월 어느 날 의료기기 회사에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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