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삼십 년 지기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옛 동창들을 오랜만에 보는 설레는 자리이기도 했다. 동창 중 한 명과 인사를 나누고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는 내가 의료기기 회사에서 일한다는 걸 대략적으로 들었던 지 대뜸 물었다. “너 무슨 일 해? 의사 선생님들 개업 도와주고 의료장비 파는 거니?”
으응?
순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동창 남편이 내과 개업의였다. 건강한 친구가 의료기기를 직접 마주할 일은 없었을 테니 가장 가까운 경험이라면 남편이 개업을 준비할 때 다녀갔을 제약이나 의료기기 회사 직원들이지 싶었다. 개업을 할 때 처방할 약을 정리하고 필요한 의료장비를 마련해야 하니 영업사원들에게는 새로운 거래처를 틀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영업사원은 제품을 설명하는 동안 마실 음료수를 사 가거나 복도 한편에 짐이 수북이 쌓여있는 걸 보고 옮기는 걸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이 동창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겠구나 싶었다.
의료기기 업계를 소개하는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의료기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한 친구에게 물어봤다.
'의료기기'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따뜻하다. 정겹다. 늘 함께이고 싶다'는 아니겠죠? (출처: 레이치노매드)
이런 거구나. 일로써 십수 년간 마주했던 나나 회사 사람들은 지극히 익숙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의료기기는 사람들에게 낯설다. 남녀노소 하루 세끼를 고민하는 음식과 비교해보면 더 명확하다. 국내 외식업 시장의 규모는 138조 원에 이르는데 비해 국내 의료기기 시장은 7조 원 정도의 규모이다.*
그래, 세상에 아프거나 아플 것 같은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보통 사람에게 의료기기는 어디가 아프거나 아플 것이라 예상될 때 만나게 되므로 ‘꼭 필요할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제품’이다. 그래서 낯설고 차갑게 인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의료기기란 사람이나 동물에게 쓰이는 기구, 재료, 소프트웨어 등을 말하는데 의료기기 회사는 이런 제품을 제조하거나 수입해서 유통하고 판매하는 회사이다. OO전자가 휴대폰, TV, 에어컨, 냉장고 등 다양한 전자제품 라인업을 가지고 있듯 의료기기 회사도 여러 분야에 쓰이는 의료기기 포트폴리오를 지니고 있다.
그럼 의료기기를 자주 접하게 되는 사람들이 누굴까? 아프거나 아플 것이라 예상되는 사람들을 만나고 치료, 진단, 관리를 하는 사람들 즉 의료종사자이다. 따라서 의료기기에서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의료종사자를 대상으로 제품을 판매한다. 의료종사자를 법령에서는 ‘보건의료인’이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보건의료 관계 법령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자격ㆍ면허 등을 취득하거나 보건의료서비스에 종사하는 것이 허용된 자를 말한다. (보건의료 기본법 제3조)
쉽게 말해 의사가 우리가 보편적으로 만나는 보건의료인이요, 의료기기 시장에서 주된 고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의료기기에 따라서 의사 외에도 간호사,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가 사용하는 제품도 있기에 의료기기 고객의 범위는 보건의료인 모두를 포함한다.
정리하자면 의료기기 회사는 의료기기를 주로 보건의료인에게 판매하며 대부분 병원에서 사용된다. 때문에 일반 사람은 의료기기가 무엇인지 잘 모를 수밖에 없고 딱히 정형화된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제주도에 있는 병원에서 제품설명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당시 담당 프로덕트 매니저(Product Manager, 마케팅 소속)였던 나는 영업팀의 요청에 따라 발표를 위해 출장 가게 되었다. 출장 가는 짐 속에는 제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챙긴 데모용 샘플도 있었다. 탑승수속을 하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중에 공항 직원이 나를 한쪽으로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내 짐 속에서 무언가 길고 뾰족한 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 싶어서 짐을 꺼내보였다. 직원은 데모용 제품을 가리켜 이게 무엇인지 물었다. 끝이 뾰족하고 손잡이가 있어 총대가 긴 총처럼 보인 것이다. 나는 공항 직원 앞에서 제품의 사용법을 시연하며 뜻하지 않게 제품 설명회를 하게 되었다.
“이 제품은 대퇴부 동맥을 지혈할 때 사용하는 제품이고요. 제품 끝에 보이는 플러그를 동맥 천자된 부위에 삽입하여 출혈을 막아주게 됩니다. 여기 긴 관은 카테터라고 부르는데요. 혈관 안으로 삽입한 후…”
공항에서의 리허설 덕분인지 제주에서 열린 제품 설명회는 순탄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의료기기는 어떤 사람들이 다루는 걸까?
대학교 학부에서 의공학과 혹은 바이오공학과를 졸업하게 되면 대부분 의료기기 관련된 직업으로 이어지게 된다. 의료기기를 개발하거나 전문적으로 다루는 회사로 가거나 연구소, 대학에 남기도 한다. 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일하거나 식약처 등 정부기관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다만, 여느 회사에서나 많은 인원이 있는 영업과 마케팅(커머셜 조직이라고 부름) 부서를 두고 생각해본다면 '전공 무관'이 가장 많다. 첫 직장을 의료기기 회사에서 시작한 나 역시 학부 시절 의료기기, 헬스케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수학을 전공했다.
전공 무관이라니? 그래도 의료기기이니 공대나 이과생들이 오지 않을까? 이 말을 들으면 씩 웃고 말 사람들이 떠오른다. 수도 없이... 입사하고 만난 같은 팀 선배는 경영학과였다. 회사의 주축 부서에서 마케팅을 하고 있는 동기는 스페인어 학과를 졸업했고 불문과를 졸업한 선배는 어느 새 부서장이 되어 있었다. 교육학과, 기계공학과 심지어는 정치외교학과, 법학과를 졸업한 사람도 있었으니 이쯤 되면 정말로 전공 무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입사 후 만난 지인들이 '수학과를 졸업하고 그쪽으로 진로를 정하는 게 일반적인 가요?'라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취준생 시절 모의 면접 때와 같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앞 글 참조 -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의료기기) '그러게요. 과 졸업생 중에서 저만 이쪽으로 왔을 것 같아요.' 하고 웃고 말았다.
'영업'과 '마케팅'은 어느 산업군에나 존재하는 직군이요, 관련된 전공지식 외에도 다양한 역량이 필요한 자리이다. 굳이 전공을 제한할 필요성이 적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입사를 하게 되면 제품에 대한 교육을 다시 받게 된다. 몇 주에서 몇 달 동안 산업군과 제품에 대한 공부를 하고 고객을 만난다. 실제로 병원을 방문하고 고객을 응대하면서 배우게 되는 내용은 더 많았다.
결국 '의료기기'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영업과 마케팅'이라는 어느 산업군에도 어울리는(?) 직군 때문에 나같은 사람도 의료기기 회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8학기 시절 취업게시판에 적힌 채용공고를 보며 흥분했던 나를 떠올려보면 그랬다.
* Fitch Solution, Interactive Charts Home, Medical Device Data for 2014~2019
한국외식산업연구원.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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