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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 Nov 21. 2023

중등도의 우울증과 재수

내게 찾아온 우울증이라는 검은 개

2월 말, 재수종합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공부를 매일 열두 시간씩 하는 삶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처음으로 사는 게 즐겁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죽음에 대한 공포로 변질되었고, 추측컨대 PESM(정신적 과잉 활동 증후군)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지푸라기 잡듯 정신과를 예약했다.



당시 나는 내가 미친 줄 알았다. 끝없이 허무주의적이고 초월적인 생각에 빨려 들어가고 뇌 신경망이 과활성화되어 멈추지 않는 걸로 모자라, 매초 행복과 불행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심했던 건강 염려증이 다시 생겼으며, 어느 날은 너무 우울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2023년 5월 2일, 엄마와 난생처음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다. 어떤 여성분이 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연신 신음 소리를 내었고 이어 구급대원들이 그를 부축해 데리고 나갔다.


‘아, 정신과는 이런 곳이구나.’


남들은 초진 때 말도 못 하고 그렇게 운다는데, 난 차분하게 증상을 말하고 무덤덤하게 진료실을 나왔다.

약간의 우울, 높은 불안, 심한 강박사고랬다. 조그만 2세대 항우울제 알약을 처방받았다.



효과가 좋았다.

불안과 강박 사고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뇌 속 회로가 진정되었고, 건강에 대한 염려도 훨씬 덜해졌다.




불안이 모습을 감추자 극심한 우울이 찾아왔다.

나의 6월과 7월은 상상하기도 싫은, 형용 불가한 어떤 검고 큰 형체에 짓눌려 간신히 숨만 쉬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우울증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을 위해 어떤 느낌인지 묘사를 해보겠다.



우울감이란 마치 심장을 짓눌리고 으깨어져 믹서기에 갈리는 동시에, 큰 운석이 위에서 나를 누르고 있는 것 과 같다. 힘이 없는 게 아닌데 걷는 것도, 양치하는 것도 버겁다.



또한 감정불능증이 주된 증상이어서, 환자들은 자신이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 같다고 묘사를 하곤 한다. 우울하지 않을 때는 주로 공허감을 느낀다.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공허함으로 인해, 뭐라도 느껴보고 싶어서,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자해 충동이 올라오기도 한다.



아무도 나를 구출해 줄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끝없이 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나 조차도 내가 무얼 느끼는지 알 수 없고 영원히 길을 잃은 채 방황할 것 같은 느낌.



결국 모든 사고는 자살로 귀결된다.

자살만이 답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래는 6월에 작성한 글이다.



우울증은 우울감만 있는 게 아니다.


움직임이 느려지며, 인지능력이 저하되어 결정장애가 생기고 계산 실수가 늘어난다. 의욕, 욕구, 의지, 감정이 사라져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느낌이다. 단순히 비관적인 게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삶과 죽음에 미련이 없어지고 갑자기 이유도 없이 두려움이 몰려온다.




우울증은 경도, 중등도, 중증의 세 단계로 나뉜다. 나는 중등도와 중증 사이 단계에 속한다.


꽤 심한 편인 내 우울증의 원인은 원체 생각 많고 예민한 기질 탓도 있지만, 우울증과 재수를 병행한 기간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던 중학생 때의 경험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겠다.) 그 경험은 우울증의 원인이었던 동시에 내가 우울증을 이기고 재수를 끝까지 해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내가 웬만한 스무 살들보다 많은 걸 겪은 강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풍족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란 연약한 사람에서, 또래들 중 가장 성숙하고 강한 사람이 된 과정을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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