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해서 할 말이 많다
진 시오파생의 < 어른이 된 영재들 > 을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영재'는 무엇인가요?
진 시오파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재성이 고도의 지능이라기보다는, 구성 요소들이 특이한 지능, 세상을 지각하고 이해하며 분석하는 방식이 남다른 지능이다. 영재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게 작동하는 강력한 지능, 그리고 삶의 매순간 영향을 미치는 강렬한 감성, 이 이중의 특성이 영구히 각인되어 있는 인성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정상이기를, 다시 말해 표준에 맞는 존재이기를 바라면서도 이 남다름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반응할 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느낌. 내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고,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반응하지 않고,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럼 내가 미친 것이다.
영재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특이한 사람이 됩니다.
- 사고의 형태
- 추론의 방식
- 세상을 인식/이해/분석하는 방식
- 격화된 감성과 넘쳐흐르는 감동성
- 알고자 하는 욕구와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제어 욕구
- 주위 환경과 타인들에 대한 강렬한 감정적 감수성
- 모든 것에 대해 언제나 문제제기를 하고 끊임없이 재검토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
- 좀처럼 편안하게 있을 수 없게 만드는 날카로운 통찰력
- 타인으로부터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을 때조차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끼는 내면의 특성
단순히 이해받고 자신의 특이함을 이해받는 것, 그뿐이다. 근본적인 것까지 다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니까. 자신만의 추론, 문제제기, 감성을 다른 사람들이 매번 따라올 수 없음을 영재들은 잘 알고 있으니까.
제 인생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영재인 줄 모르고 자라 스무 살에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가는 중인 저의 어릴적 얘기를요.
부모라면 아기들의 등 센서를 모를 리가 없다. 나는 그 등 센서가 매우 예민했고, 잠도 안 자고 허구한 날 울어댔다. 그때가 내가 유일하게 마음껏 감정을 표출했던 시기가 아닐까. ㅜㅜ
한 달 일찍 1키로 대로 태어났고, 말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시작했는데 굉장히 정확했다. (영재아들은 말이 빨리 트는 게 흔하지만, '틀릴 거면 말을 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에 말이 평범하거나 늦게 트이기도 한다. 많은 영재들이 완벽주의가 있기 때문이다. 미숙함을 보이기 싫어한다. 나의 경우 7살 때 수술을 받았는데, 굉장히 두려웠지만 일부러 의연한 척을 했고, 갖고 싶은 것들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거나, 실수를 심하게 경계했다.
또한 당연한 규범에 의문을 표하고 끝없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했다. 고집도 세서 절대 굽히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갖고 싶은 게 있어도 논리적으로 납득만 되면 절대 사달라고 하지 않았다.
또한 수학적 영재의 특징으로, 디테일이 좋았다. 인체 구조에 관심을 가지거나 다양한 그림을 그려 할머니께 1000원에 팔곤 했다.
유치원 때는 큰 수 아무거나 두 개를 써놓고 덧셈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다.
1738282171729+1627281817181 이렇게.
나의 가장 큰 재능은 언어 능력이다. 외국어 발음도 좋고, 6살 땐 중국어 노래를 그렇게 따라 불렀다. 마지막으로 영재아들은 에너지도 많아서 걷는 법이 없이 늘 뛰어다녔다. 당시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별명 '뛰순이'. ㅎㅎㅎ
많은 친구들이 영재교육원에 다니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나는 그런 시스템이 있는지도 몰랐다.) 결국 서울대 의대, 카이스트 조기입학 등 좋은 성과를 낸 친구들이 수두룩하다. 끼리끼리 법칙에 의하면 나도 친구들과 결이 비슷했겠지? 그래서 교우관계도 좋았고 또래들 사이에서 이질감도 없었다.
유아기에 이어 초등 시절에는 받아쓰기를 늘 한 개 이하 틀리는 것으로 언어적인 재능이 드러났다. 맞춤법을 틀리는 친구들을 보며 괴로워하는 건 내 몫이었다. 습득이 빠르기 때문에 글쓰기, 체육, 미술 분야에서 늘 상을 탔고 시험 성적도 좋았다. 자존감이 낮을 수가 없었다.
8살 무렵부터 영재교육원에 다녔는데 영재고 뭐고 그저 가기 싫은 학원일 뿐이었다. 영재가 뭔지도 몰랐고. 5학년 때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학교 내 영재 학급에도 합격했다. 상위 0.x%의 지능을 가졌다는 걸 엄마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고 그게 어쩌면.. 불행의 서막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애들 아빠가 똑똑하니 애들도 똑똑하겠지.’)
영재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넘치는 감동성이다. 9살 때 캐나다에 여행을 가기 전 심장이 터질 듯이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도 수업 시간에 착륙까지 140시간 24분.. 계산하곤 했다. 12살 땐 네덜란드어에 푹 빠져서 하루 종일 노래를 듣고, 가사를 번역하고, 문법을 공부했다. 영재아의 몰입 특성이다. Marco Borsato의 노래를 들으며 진심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던 적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런가 하면 감성이 예민해서 엄마 몰래 핸드폰에 게임을 깔고 죄책감에 엉엉 울면서 자백한 적이 몇 번 있다. 혹은 12살 때 초등학생 둘을 데리고 미국 여행을 가는 엄마에게 미안함, 고마움, 안쓰러움 등 복합적인 감정을 느껴 심장이 실제로 아렸던 적이 있다. (그 후로 나는 감정이 격해지면 심장이 아린다.) 이 외 여러 이유들로 초등 중/고학년 때 엄마께 느낀 가장 큰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부모님이 사주신 것들에 질려서 충분히 갖고 놀지 않는 것, 거짓말 한 것, 산타의 실체를 알게 된 것 등)
중간에 몇 년 연락이 끊겨도 아직도 애틋한 초등생 시절 절친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 역시 몰입 특성에 센 고집까지.. 영재의 정석인 아이다. 그 친구와 매일같이 사랑한다며 문자를 하곤 했다. 서로 진짜 좋아했다. 매일같이 소리 지르며 흥분했고, 밖에서 만나면 격한 포옹부터 했다. 이렇게 초등학교 때는 나의 과한 감성을 받아줄 친구가 여럿 있었다.
참고 또 참고 자제하다가, 급기야 폭발한다. 감정이 흘러넘친다. 행동은 마구 날뛴다. 이 격렬한 폭발은 그 시작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일이기에 그만큼 더 인상적이다. 감정이 한계치에 이르면, 감정은 다스려질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런 특성은 영재들에게서 자극에 대한 반응성의 한계치가 보통 사람들보다 현저히 낮고 감정 조절 능력이 덜하다는 것에 기인한다.
여기까지는 희망적인 얘기였고, 이제 삶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한다.
4학년 즈음부터 영어 학원, 6학년부터는 선행 진도가 빠른 수학 학원을 다녔다. 숙제는 하기 싫고, 그래서 미루고, 마음은 너무너무 불편하고, 전날에 부모님께 짜증 부려가며 겨우겨우 하고, 울고불고... 감정이 격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이사+전학을 갔고 영재교육원은 그만두었다. 이전까지 완벽에 가까운 행복한 삶을 살았던 나는 상처를 잘 받고 인간관계에서 쉽게 약자 입장이 된다는 특성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 미성숙한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자존감이 급락했다.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넘치는 감성 때문에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퍼주다가 상처받기 일쑤였다.
제일 큰 문제는, 영재를 아주 특별한 혜택을 입고 태어난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이 아직도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하긴 영재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역설을 어떻게 쉬이 받아들이겠는가. '극도의 지능과 상처받기 쉬운 과민한 정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연관'이라는 역설 말이다.
스트레스는 시각 전조 편두통, 강박, 건강염려증과 선택적 함구증으로까지 이어졌다. 중학교 1학년 무렵 처음 죽음에 대해 생각했고, 감정을 억누르고 숨겼다. 폭력이나 왕따를 당한 게 아님에도 그에 버금가는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이 역시 어느 정도는 영재성에 기인한다.) 적응장애였던 것 같다.
동시에 열렬한 아이돌 덕질을 시작했다. 아~~~주 푹 빠져서 지금도 엄마가 그때를 회상하시며 고개를 내저으신다. 오전 3시에 일어나 콘서트 굿즈 밤샘 줄을 서고, 영상을 보면서 울고, 모든 앨범과 포토카드를 모으고, 모든 콘서트와 팬미팅에 갔다. [=몰입 특성] 감정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날들이었다. 또래 중 나보다 열성적인 사람은 없었다. 감정도 꽤 성숙해서 연애도 안 해본 놈이,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이 뭔지 많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쉬웠다. 분출하는 감정을 공유하며 풀어내지 못하고 혼자 삭혀야 했으니. 이건 네덜란드어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12살)부터였고, 중학교 1학년 때는 친구들이 진지하게 아이돌 얘기 좀 그만하라며, 혼자 맨날 흥분해있다고... 내게 말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발견하면 좋아서 소리를 지른다. 외로웠고, 반가워서.
중학교 3학년, 이미 물리학과를 지망하고 있던 나는 반 친구들에게 문과인지 이과인지 물었고 크게 실망했다. 문이과조차 정하지 못한 친구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과학 얘기를 하고 싶은데 상대가 없어서 또 혼자 삭혀야 했다. (이때 만나 과학 얘기를 나누었던 교회 담임 선생님이 상위 1% 고지능자이셨다. 내 영재성을 발견해 주신 분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분이다.)
나에게 있던 너드 같은 모습들을 무의식적으로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야 이상한 애 취급을 받지 않을 테니까. 내가 섞이지 못한 건 내가 이상해서니까.
이젠 이런 식의 대답이 '이상하다'는 걸 알기에 입으로 내뱉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영재라는 것도 몰랐고, 초등학교 때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상을 타긴커녕 반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했으며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미성취 영재로의 길. 영재라는 걸 모른다면 더더욱) 내 관심사는 묻히기 일쑤였다. 점점 영재와 멀어져 간다...
재수를 하는 지금보다 더 우울하고 불안했던 중학교 시기, 악착같이 공부했다. 좋아하는 과목은 90점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반면 기술 가정이나 역사 같은 암기 과목들은... 6~70점대였다.
영재 특) 재미없으면 안 함. 암기 싫어함.
지금도 그렇다. 전공 공부는 재미 있으니 다행이지, 몇 달 전 했던 수능 공부도 어떻게든 재밌다고 세뇌하며 공부했다. ('니체 아저씨의 주장을 읽어볼까? 오구오구') 재미없으면 과장 없이 손도 안 댄다. 가만히 노려보다가 접는다.
타인들을 통찰한다는 것은 우선 자기 자신을 통찰하는 것이다. 영재들은 한 치의 양보 없이 자기분석을 하고 자신의 결점, 한계, 사소한 결핍까지 모조리 인식한다. 즉 자기애적인, 자기도취의 매혹은 더욱 어려워진다. 자기 자신에 대해 준엄한 시선을 던지고, 따라서 자기를 사랑하기가 힘들다.
고3 때 화병이 있었던 나...
급기야 3학년 땐 가장 큰 결핍 세 가지 중 하나로 '지능'을 꼽았다. (다른 두 개는 외향적인 성격과 봐줄 만한 외모) 늘 애매한 2~3등급이었다. 입시 공부도 너무 재미없고, 하필 과학중점반에 들어가서 지능지수 115~130(전편 참고)의 친구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대학 입시는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 굳이 자세한 설명은 안 하지만, 친구들과의 끝없는 비교 탓에 자존감은 거의 복구되지 않았다.
그간 과한 감정 때문에 지쳐서인지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감정을 서서히 못 느끼게 되었고, 현재는 항우울제의 위력까지 더해져 감정 불능증이 많이 심해졌다.
그리고 어쩌면 예외적으로, 이전까진 크게 티 나지 않던 영재성이 고등학교 3학년 때 표출되기 시작했다. 영재는 카멜레온 같다는 특성이 있다. 이때부터 성격을 바꾸고, 자아를 두 개로 분리해 사람들과 섞이고, 철학적인 의문들을 품었으며,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자각이 의식적인 수준에서 이뤄졌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느낀 감정은 이질감과 괴리감이었다. 그걸 알기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얼마 없으니까!
현재 가장 친한 친구 S양. 아직 감정이 남아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면역계 강의를 들으며 깊게 감명받아서 함께 눈물 흘리고, 겨울에는 걸어 다니며 얼음의 어는 점에 대해 얘기하고, 화상 통화를 몇 시간동안 하며 우주의 시공간적 유한함에 대해 논쟁하고, 코로나 백신의 안정성을 의심하다 결국 둘 다 접종하지 않았다.
IQ, EQ와 사회적 지능이 모두 높은 것이 가장 이상적인데, 중학교 때 호되게 당한 후로, 셋 중 가장 부족했던 사회적 지능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4년 전 선택적 함구증이 있던 나는 이제 사람을 대하는 게 제일 쉽다.
나아가 영재는 자극에 민감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몇 배에 달하는 input(자극)을 기반으로 하여 대체로 또래에 비해 성숙하게 자라난다. 그래서 이제는 전 연령대의 사람과 영양가 있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요약: 영재는 눈물도 많고 울 일이 많다.
인간관계에 약하고, 또래들과 공유하는 관심사도 없어서 소외되고, 그로 인해 이질감을 느껴서 외롭고, (내가 똑똑하다는 사실도 모른다면)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위축되고, 상처를 쉽게 받고 민감하다는 특성으로 인해 이 모든 불행(굉장히 축약했지만 13~16살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우울증+입시 스트레스도 못 이긴다. 그게 영재의 특성 때문인 걸 생각하면 좌절스럽지 않을 수 없다.)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우울증으로 발전했고, 영재는 불안장애에도 취약해서 저 역시 불안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지능은 상위 1~2%라면서 성적은 왜 2, 3등급대에 머무는 걸까요?
영재는 왜 불안해할까요?
그 이유는 다음 편에서… 영재성이 왜 X같은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