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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서영 Apr 19. 2022

변화에 쫓기는 아티스트들에게

리암 갤러거가 음원에 똥을 싸도

정체를 두려워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창의적이지 않다는 것


넵워스에 가지 못하는 한을 앨범에 대한 기대감으로 채우기 위해 새 싱글들을 질리게 듣는 중이다.


리암 갤러거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싱글 C’mon You Know 라이브 영상을 보다가 정말이지 가슴이 뛰는 댓글을 발견했다. 전형적인 불호 댓글이었는데, 영상에 달린 수많은 팬들의 찬양 댓글에 대한 반박이었다. 리듬은 단조로우며 초보적이고, 멜로디는 유행이 지났으며, 리암 갤러거는 비디아이 이후  이상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디로 자기복제를 비판하는 댓글이었다. 팬들은 아마 리암 갤러거가 음원에 똥을 싸도 좋아할 거라고.


나는 뭐 그렇게 열성적인 팬이 아니면서도 이 댓글이 이상하게 좋았다. 오히려 ‘창의적이지 않은’ 그의 노래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뭐랄까, 리암 갤러거는 사람이 참 한결 같아 보인다. 중년이 되어서까지 반항적인 락스타의 모습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점도 그렇지만, 선보이는 무대나 노래도 전혀 바래지 않았다. 같은 패션과, 같은 무대매너와, 비슷한 창법,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맞다) 비슷한 노래까지. 리암 갤러거는 오아시스 시절의 자신을 잃을 마음이 별로 없다. 자신의 오아시스 시절을 사랑하고, 사랑받은 이유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려 한다.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내가 매번 그의 노래를 기다리는 이유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힘들었던 시기에 오아시스 노래를 많이 들었다. 독서실에서 홀로 울며 공부하던 고3 시절에 리암 갤러거 2집이 나왔는데, (그때의 오바스러움을 참작하자면) 앨범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정말 망했다. 죽을 때까지 발목 잡혔다. 내겐 그 앨범이 오아시스를 잃지 않겠다는 리암 갤러거의 결심처럼 들렸다. 오아시스의 그를 좋아한 사람이라면 이제 그의 노래를 듣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참 좋습니다. 여전하게도.


어떤 아티스트나 프로듀서들은 자기 복제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그러한 강박은 가끔 듣는 사람들의 적이 된다.


잘 하던 걸로 계속 해주시면 안 될까요. 똑같은 앨범 백 개 내도 되니까 내가 사랑했던 그 감성으로 당신의 늙어가는 목소리를 들려주면 안 될까요. 노엘 갤러거가 지적했던, 오아시스 1, 2집이 그들에게 평생 적이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그 결과 그 송라이터가 쓰는 노래는 예전의 것들과 (좋은 의미로) 전혀 딴판이 되었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자신만의 음악적 여정을 걷는 아티스트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색깔을 유지한 채, 어쩌면 조금은 지루할 수 있는 작품을 내놓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에 대한 비판과 비평이 이루어지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아티스트도 변화를 빚지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90년대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리암 갤러거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그의 (특별한) 목소리로, 오아시스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가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의 (여전히 특별한) 목소리로, (예전의 것과 비슷한) 노래를 부른다. 한 마디로 자기가 잘 하는 걸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좋다. 오아시스 노래들이나, 그의 이전 노래들이나, 하이 플라잉 버즈와는 더욱이, 비교할 필요가 없다.


이번에 나온 리암 갤러거 싱글을 들어보세요. 어떤가요. 참 좋습니다. 여전하게도.




2018년의 보헤미안 랩소디



다행히도 리암 갤러거의 경우는 아니지만,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하려는 강박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당신이 예전과 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당신의 음악이 정체된 건 아니다.


특정 시대의 좋은 노래는 그 시대성을 영원히 간직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종속되는 것 같지는 않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하면서 당시의 복고 열풍에 힘을 실었고, 80년대의 퀸 노래를 2018년의 한국 사람들이 홀린 듯이 많이 들었다. 그렇다면 라이브 에이드 무대와, CGV 보헤미안 랩소디 싱얼롱은 같은가?


음원이 그대로여도 시간이 흐르면 노래는 멈춰있을 수 없다. 나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영화가 유행하자 급식실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퀸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머큐리의 목소리에 담긴 80년대의 향수는 분명 그대로이나, 멀티플렉스 싱얼롱관과 코인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른 사람들에게 그 노래가 가지는 의미는, 당시 라디오나 LP판으로 들었던 사람들의 것과 같을 수 없다.


음악은 분명 시대를 추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스쳐 지나가다 보면 전에 없던 것들을 담게 된다.



그게 여전히 당신이 사랑하는 무언가라면


조급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이전과 비슷한 노래를 내든 다른 노래를 내든 시간이 지나면 그건 당신의 손을 떠나가 버리고, 사람들은 그 노래에 맘대로 의미를 붙여 부르고 다닐 것이다. 그러면 노래엔 더 이상 당신의 걱정과 조바심이 남아있을 자리가 없다. 획기적인 시도로 좋은 평가를 받거나 비슷한 스타일로 비판을 받을 순 있겠지만, 그러한 평가는 결국 당신 과거와의 비교일 뿐이며 영원히 유효한 것이 아니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몇 집의 수록곡이든 알 게 뭐란 말인가? <Stand by me> 나 <Don’t go away>가 1, 2집보다 못한 평가를 받은 오아시스 3집에 수록됐다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어쨌든 그것들은 여전히 사랑받는 좋은 노래인 것을.


그러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 노래가 좋냐는 게 아닐까. 노래가 변함없이 좋다면, 그리고 그게 여전히 당신이 사랑하는 무언가라면, 당신의 이전 히트작만큼 관심을 받진 못 할지라도 청자들에겐 그저 고마운 선물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지루하고 유행 지난’ 것일지라도, 우리에겐 ‘음원에 싼 똥’이 아니므로 안심하기를.


모든 리암 갤러거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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