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밥과 샬럿이 내가 경험한 타지에서의 외로움과 소통되지 못 한 공허를 알아봐주었다고 느꼈다. 내가 그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단지 그것 때문이었지, 그 이야기가 감독인 소피아 코폴라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알았더라도 영화에 대한 감상이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다.
관객들은 네가 궁금하지 않아, 이야기가 궁금한 거지. 누구의 이야기인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그런 건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내가 소피아 코폴라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창작물은 수용자의 의식과 경험에 의해 잔뜩 소화된 채로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경주가 예빈에게 쏟아냈던 말은 아픈 진실이다. 이야기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자주 사라지고 만다.
그 이야기가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에는 넘어야 하는 산이 너무 많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영화가 투자 받고 제작되기까지, 그리고 배급되어 사람들에게 닿기까지 만족시켜야 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 권력 있는 감독이 아니라면, 게다가 경주처럼 권력에 짓눌린 채라면 창작자는 자신의 진실을 잃어버리기 쉽다.
경주는 시나리오가 교수에게 통과되지 못해 졸업을 못 할 위기에 놓여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판이다. 그런 경주는 입시반 학생 예빈의 존재가 좀처럼 견디기 힘들다. 예빈에게는 자기 이야기에 대한 확신, 자신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치기, 그리고 교수가 좋아할 만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모두 경주에게는 희미해져 버린 것들이다.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임에도 예빈 앞에서 경주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건 예빈에 대한 열등감에 더해, 자신의 신념에 반해 남의 이야기를 뺏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예빈의 이야기를 훔쳐가 놓고 관객은 네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며 뻔뻔하게 일침을 놓아야 했을 때, 칙칙한 벽돌을 배경으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는 경주는 온갖 마음의 짐에 짓눌려 작아진 채 꼿꼿하게 서있는 예빈을 한껏 올려다 본다.
경주에겐 눈을 질끈 감는 버릇이 있다. 학생들에게 관객이 없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고 했잖아, 라며 신념에 반하는 말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고, 예빈의 시나리오가 자신의 것과는 달리 교수의 취향에 꼭 맞을 거라는 걸 깨달은 후에도 그랬다. 저는 아직 쌤처럼 뭐가 맞고 틀린 건지 그런 건 잘 모르지만, 꼭 선생님 후배 돼서 내년 영화제에서 꼭 영화 보러 갈게요. 어쩌면 자기가 망쳐버렸을지도 모르는 예빈의 믿음 어린 순진한 말을 듣고 나서도 그랬다. 경주는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의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걸 포기해버린 것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외면하고자 눈을 감아버린다. 더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자신의 이야기는 지키고자 했으면서 예빈의 진실은 빼앗아버린 자신의 치졸함과 비겁함이 바로 눈 뜨고 마주하기 힘든 경주의 새로운 진실이다.
진실을 지켜내지 못한 창작자에 대한 영화. 이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낸 감독은 자신의 진실을 지켜냈을까, 아니면 이 또한 현실에 짓눌려 힘들게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야 했던 투쟁의 산물일까. 창작자의 진실에 시선을 주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