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완다의 절망
이렇게 끝없는 불행을 짊어진 캐릭터라니.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시작한 완다의 불행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평행우주를 손에 넣겠다는 무시무시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화의 ‘선역’들을 맘 놓고 응원하기가 쉽지 않았다.
완다는 자신을 막아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있는데, 도대체 왜 고통스러운 이 현실을 살아야 해? 그러나 그들은 완다가 벌이려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지 경고할 뿐, 고통을 이해하고 대안을 찾아주려 하지는 않았다. <완다비전>에 이어 이번 영화를 보고 나니 난 이제 우주의 질서 같은 건 모르겠고, 완다가 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완다가 분노 대신 도대체 무엇을 택했어야 했는지 답을 구해보고자 했다.
완다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
죽을 만큼 강렬한 소망이 있다고 하자. 내게 너무 중요해서, 그것을 이루지 못한 현실을 너무나 비참하게 만드는 것. 그런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세계가 있으며 그곳에 충분히 닿을 수 있다면, 대체 왜 그래서는 안 되는가? 무고한 아이를 희생시키고 우주의 균형을 깨뜨리는 일 같은 뻔한 윤리적 문제가 없다고 해도 여전히 현실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완다를 대신해 던진 이 질문에 답한 것은 키르케고르였다. 이 실존주의 철학자는 완다가 불행에 대한 해답을 잘못된 곳에서 찾고 있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면, 온갖 흑마술을 부려서 결국 그것을 손에 넣어도 행복할 수 없다. 절망이 있는 곳은 아이들이 아니라, 완다 자신이므로.
키르케고르여야 했던 이유는 그의 저술인 <죽음에 이르는 병>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바로 절망이다. 절망이 사람을 죽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고 평가한 이 사람이야말로 상실의 연속인 완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르케고르는 절망하는 주체가 절망을 인지하는지, 그리고 그리고 그 절망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따라 개념을 세분화했다. 그중 완다가 느끼는 것은 주체가 인지하는 절망 중에서도 세속적인 것에 대한 절망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되지 않고자 하는 경우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속성을 직접성이라고 표현했다. 직접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 외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기 때문에 환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 (Harsh, 1997, p. 56) 자기 내면에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하여 고통스러운 사람은 그것이 부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을 택한다는 것이다. 완다가 아이들의 부재를 견딜 수 없어 평행우주를 손에 넣으려 한 것을 정확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 개념을 인간관계와도 연결지을 수 있다. 존재적인 고립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려고 한다 (Yalom, I.D., 1980). 즉 완다가 현실을 살지 못하고 평행우주에 몰두하게 된 것은 고통을 겪는 완다를 정의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의 완다에게서 우리는 동료들과 세상을 구했던 히어로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아이들을 잃은 분노에 싸인 엄마만 있을 뿐이다. 소중한 것들을 잃으며 계속 혼자가 되었던 완다에게 오빠, 비전, 그리고 아이들은 버팀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불행의 근원이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사실 이런 절망은 다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온다. 그는 사랑에 고통 받는 소녀의 예를 들며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에, 그의 죽음에, 그의 부정에 절망하는 것은) “진정한 절망이 아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그녀가 벗어나려고 했던, 혹은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은 “그의” 연인이 되었고, “그의” 존재 없이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Kierkegaard, 1849 /1980, p. 20)
즉 완다가 아이들의 부재에, 나아가 부모님, 오빠, 비전의 부재로 분노하는 것은 사실 그들 없이 존재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완다 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평행세계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아이들과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완다의 절망에 책임이 있는 것은 오빠를 죽인 울트론도 아니고, 비전의 죽음에 기여한 타노스 또한 아니다. 절망은 그들을 도저히 떠나보낼 수 없는 완다 자신에게서 온다.
행복해?
그러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뎌야 하는 것은 완다만이 아니었다. 이번 영화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험은 하나의 질문에 솔직한 답변을 내놓는 과정이었다. 크리스틴이 그에게 물은 “행복해?”란 아마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멀티버스가 가지고 있는 끝없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후회 투성이인 이 현실에서, 너는 지금 행복해?
스티븐도 사실 <엔드 게임>의 후유증 속에 살고 있다. 어벤져스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블립에 의해 소중한 것들을 잃었고, 타노스가 세상의 반을 날리도록 내버려둔 닥터 스트레인지의 결정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의심한다. 스티븐은 분명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여파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할 수 없다. 그에게도 이 현실은 만족스럽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했고, 목숨을 걸고 세상을 구했는데도 죄책감과 막중한 책임감은 여전하다. 평행세계의 그가 크리스틴과 함께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멀티버스를 헤맨 것도 이 때문이다. 완다의 경우처럼 스티븐의 절망도 크리스틴의 부재에 있지 않다. 절망은 그 관계에 대한 미련으로 고통받는 자기 자신에게 있으므로, 다른 우주를 찾아 나서는 그의 시도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스티븐, 616의 스티븐은 달랐다. 마지막 장면에서 웡은 다른 세상의 자신을 궁금해하면서도 현실의 아름다움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스티븐은 “혼자 헤쳐나가는 게 아니니까.” 라며 동조하고는, 처음으로 수프림 소서러에게 예의를 갖춘다. 스티븐은 놓쳐버린 크리스틴이 아니라 곁에 있는 웡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게 아니라, 부서져버린 카마르 타지를 재건하고 생텀의 자기 자리를 지킨다. 주어진 현실이 고통스러운 것은 완다만큼 스티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스티븐이 완다에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차이점 때문이었다. 스티븐은 ‘일어날 수 있었던’ 다른 현실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지금의 현실을 살았다. 멀티버스의 수많은 다른 세상이 자신의 불행을 덜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여전히 살아볼 만한 삶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파멸을 불렀다는 키르케고르의 설명은 분명 완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부터 <인피니티 워>와 <엔드 게임>, <완다 비전>, 그리고 이번 영화까지 완다가 겪은 모든 일들을 목격한 관객이라면 마냥 완다를 악당으로만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완다의 사악한 계획이 사실 최선을 다해 이성적인 것이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겪었던 불행을 짧게 되돌아보자. 어렸을 때 부모를 잃은 후 모든 어려움을 함께한 오빠는, 스스로 만든 위기에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웬 히어로 집단의 전쟁에 휘말려 죽었다. 그럼에도 정의를 위해 이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더니, 이번에는 우주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불행을 보듬어준 연인을 직접 죽이란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고통에 허우적대다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환상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없는 가족마저 떠나보냈다. ‘진짜로’ 행복하고 평범하게 사는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해치면 안 되기 때문에. <완다비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빈 집 터를 쓸쓸하게 바라보는 완다의 고통이 가늠되지 않는다. 끝없이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는 과정 속 기적처럼 다가온 사랑에 어떻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의 결론은 원죄의 인식과 함께 신앙에 몰두해야 한다는 매우 기독교적인 것이었다. 이런 부분을 제외하고 절망에 대한 그의 설명에 따르면, 완다와 같은 종류의 절망에 빠진 이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완다에게는 자기 자신이 없다. ‘가질 수 있었던’ 아이들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키르케고르의 이론과 심리치료를 연계한 연구에서는 절망에 대한 치료법으로 ‘게슈탈트 요법’을 제안한다. (Harsh, 1997, p. 63) 게슈탈트 요법은 발생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한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곳에 존재하는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돕는 심리 치료 방법이다. 완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매여있으면 안 됐다.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려도 자기 자신만큼은 여전히 실존함을 깨달았어야 했다.
우리는 어벤져스의 정의로운 히어로였던 스칼렛 위치를 기억한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그는 하이드라에게서 벗어나 스스로 어벤져스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고, 그 후에도 수없이 세상을 구했다. 전쟁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대의를 추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완다는 수없이 자신을 배신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완다를 존경했다. 그의 얼굴이 박힌 도시락 통이 있으니 말 다했다. 이게 살아볼 만한 삶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단지 허상이었을지라도, 그리고 결국 전 우주적 위기의 원인이 되었어도, 나는 완다가 아이들과 잠시나마 행복을 느꼈음에 다행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도 완다의 삶은 충분히 유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그 끝없는 불행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완다에게
닥터 스트레인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칼렛 위치를 무너뜨린 것은 완다 자신의 한 마디였다. 늘 사랑으로 키울게. 이런 결말 또한 키르케고르의 진단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다. 나는 완다가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이 고통의 늪 속 최선의 선택이 이것이라면, 키르케고르의 이 답변을 완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절망은 자신에게 있으므로, 함께했더라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순 없었을 것이라고. 아이들을 놓아주지 못한 것은 실수였으며, 어느 우주의 그들이 잘 지내는 모습을 때때로 꿈꾸는 것만이 최선이었다고. 고통스럽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해야 했다고.
그러나 만약 이게 완다의 마지막이라면, (이렇게 입체적이고 잠재력 있는 캐릭터를 너무 이르게 끝낸 제작진들을 원망하며) 그간 이야기를 지켜봤던 관객으로서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정의로운 히어로이자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으므로 누군가 없이 홀로도 충분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웠지만, 최선을 다했음에 감사하다고.
참고자료:
Harsh, Michael A., "The Sickness unto death: Søren Kierkegaard's categories of despair" (1997). Student Work. 56.
Kierkegaard, S. (1980). The Sickness Unto Death (H. V. Hong & E. H. Hong, Tran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849).
Yalom, I. D. (1980). Existential psychotherapy. New York: Basic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