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여행, 가족에 관한 이야기.
스물넷이 되도록 한 남자를 존경과 경의를 담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영영 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교통사고였다.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사고가 있기 몇 주전 무뚝뚝한 아버지의 보고 싶다는 말씀에 “아빠, 많이 사랑해요. 오래 살아. 효도할게.”라는 평소에는 애교 없던 딸의 낯간지러운 대답만이 위로가 되는 쓸쓸한 죽음이었다.
여행이라는 낭만적이고 설렘 가득한 단어가 한(恨)이 되는 순간이 있다. 노르웨이 키오스 폭포(Kjosfossen)를 바라보던 순간이 그랬다. 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북유럽을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인 7월, 가파른 협곡과 바다가 이어지는 눈 덮인 설원을 달리는 기차여행은 동화 속 세상과도 같았다. 폭포를 배경으로 붉은 옷을 입고 노르웨이 목동들의 전설 속 요정인 훌드라(Huldra)를 재현하는 춤사위를 바라보다 어릴 적 아빠 품에 안겨서 폭포수를 맞던 기억이 떠올랐다.
귓전을 치는 폭포 소리에 깜짝 놀라 울음을 터트린 나를 다정히 안아 올린 아빠는 폭포 아래서 함께 사진을 찍으며 말씀하셨다. “어때, 괜찮지? 별거 아니지” 아버지의 말씀처럼 사는 게 별거 아님을 아는 기억 속 그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 아버지를 꼭 닮은 흰 피부를 가진 아이를 보며 그를 추억한다.
제 밥벌이를 시작한 자식이 효도 비슷한 것들을 할 때면 엄마는 아쉬워하셨다.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탄식과 먼저 간 이에 대한 야속함이나 원망 같은 감정이 교차하는 모양이다. “젊어서는 고생만 시키더니 늙으면 같이 여행 가자고 해놓고.” 갓 쉰을 넘은 나이에 혼자가 되는 심경은 어떠했을까. 당시에는 무슨 여행 타령일까 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다.
생에 가장 젊은 날에 만난 누군가와 살아온 날보다 더 긴 세월을 함께 보내는 결혼생활은 여행과 닮은 면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아이와 함께하는 삶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낯섦과 미숙함이 친숙함과 능숙함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건강관리를 열심히 한다. 평생을 열렬한 사랑의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이라는 긴 여정에서 큰 낙오 없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아이가 성년이 되어 떠난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이국적인 풍경과 경이로움에 슬픔이나 그리움보다는 기대와 설렘을 먼저, 그리고 온전히 느끼기를 소망한다. 늦은 밤 숙소에 돌아온 아이가 조잘조잘 하루의 일과와 자랑을 늘어놓으며 안부를 전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평온하다.
친구 같은 부모-자식 관계를 꿈꾼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아버지와 나’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연예인 아들과 평범한 아버지의 일주일 여행기가 담겨 있는데, 에릭남이라는 가수와 아버지의 체코 여행기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출연진들과는 달리 어색함이나 부자연스러움이 없이 식도락 여행을 콘셉트로 잡은 프로그램이었다.
체코의 지붕은 왜 다 붉은색인지, 프라하의 종탑은 몇 개인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오랜 친구와의 여행처럼 편안하고 유쾌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가 내한 스타 위주 리포터로 활동할 당시 세련되고 배려 깊은 인터뷰 태도는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역시나! ‘에릭남 심은 데 에릭남 난다’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그의 아버지의 교육관이나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아들의 여행 계획을 전날 미리 공부는 하되, 계획은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든지, 행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면 본인도 사진을 찍어줄지 물어보는 행동들의 울림이 컸다.
남편과 나는 조경규 만화가의 <오무라이스 잼잼> 단행본을 읽고 베이징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중국을 배경으로 다양한 음식의 유래와 가족의 일상을 소개하는데, 음식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매력적인 책이다. 6살 아이가 그 책을 읽으며 자기가 없던 시절의 엄마와 아빠 이야기를 듣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사진을 보며 추억하는 것을 재밌어한다.
때때로 성가시다고 느꼈던 마음이 부끄러웠다. 남편과 내가 여행했던 그 장소, 사진 속 그곳에 아이들과 가보면 어떤 기분일까. “너네는 어떤 음식이 맛있어 보이니? 엄마와 아빠는 어떤 음식의, 어떤 맛이 좋았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방문할 식당을 정하고, 구글맵에서 위치를 확인하는, 비행 편과 숙소를 예약하기까지 과정을 함께 해보고 싶다. 모름지기 여행은 비행기를 타야 맛이니 모쪼록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고대한다.
근사하고 멋지거나 혹은 대단한 것을 처음 접했을 때 떠오르는 사람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라고 한다. 여행이라는 것이 본디 호사인지라 사춘기를 지나며 소원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로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신실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나는 늘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옛날 무서움에 떨던 나를 체온으로 따뜻하게 안심시켜주던 아버지처럼 나도 아이에게 세상살이가 별거 아님을 온몸으로 알려주고 싶다. 내 인생에서 다정한 여행자였던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다감한 어머니로 살아야겠다. 이제는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 허전하지만 허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