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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30. 2022

실례지만 제 마음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솔직한 마음에 친절하고 싶은 이야기.





며칠 전 직장에서 사귀었던 친구를 만났다. 이십 대의 끝자락에 만났던 친구는 어느새 14개월 남자아이를 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아이는 지난달부터 어린이집을 다닌다고 했다. 어린아이처럼 늘 헤-에 소리를 내며 웃던 친구의 얼굴에 그늘이 지다 이내 사라졌다.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어린이집 같은 반 친구에게 어깨를 깨물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과가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깨문 친구 어머니도 경우가 없으신 분은 아니세요.” 유선으로 상황을 전달받은 그날의 하원길은 평소와 다름없었다고 했다. 깨문 친구의 어머니는 해당 원에 재직 중인 다른 반 교사라고 했다. “사과를 받는다고 00이 안 물린 게 되는 것도 아니고. 괜히 문제 삼아서 무엇하겠어.” 친구는 말을 아꼈고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A가 B에게 물리적인 위력을 행사했다. A와 B는 만 0세다. 으레 말보다 행동이 앞서기 마련인 나이니 고만고만한 아이들 다수가 생활하는 어린이집 특성상 유감스러운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크고 작은 불미스러운 상황들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편했다. 상황에 대한 반응이나 대처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큰일이 대수롭지 않은 때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친구에게 물렸을 당시 놀랐을 아이의 마음과 또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부모의 심경은 헤아림의 대상마저 되지 못한 것 같아 무안했다.      


친구의 말처럼 별말 없이 넘어가는 것이 현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부정적인 상황에서는 침묵만이 현명한 대안이고, 솔직하게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문제인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여섯 명의 급우들과 함께 교실 앞으로 불려 나가 손바닥을 맞은 일이 있었다. 체벌의 이유도 선생의 이름도 잊었지만, 선생의 표정과 그날의 적막과 그가 가르쳤던 과목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국어 선생이었던 그는 자신의 행동을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중간 어디쯤 서서 친구들의 손바닥 위를 스치듯 지나가는 회초리를 바라보며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회초리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찰-싹. 반 전체가 술렁였다. “왜, 쟤만”, 그러게. 왜 나만. 무슨 연유로 본보기가 되어야만 했을까. 영문을 몰라 의문은 모멸감이 되었고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두려움은 나를 갉았다. “선생님, 왜 저만 세게 때리세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예의에 어긋날까 꺼내놓지 못한 속마음은 스무 해가 지난 지금에도 찬 바람이 불고 있다. 친구도 나도 왜 이렇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에는 냉담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만 살피고 있나 싶었다.      


모든 감정은 정당하다.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고 불의를 보면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매 순간 “아야”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늘 “괜찮아” 할 필요도 없는 데. 그간 마음에 무심하지는 않았나 돌이켜 보았다. 지나온 시간과 삼켜버린 말속에는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을까. 마음은 다르지만 같다. 상처받고 싶지 않기에 상처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문장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자기 존중과 수용이 빠진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와 존중은 위선이라고 했던가. 자신의 감정에 옳고 그름의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야 타인의 감정에도 다정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계절에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보통의 마음에게 친절했으면 좋겠다. 솔직함이 곧 무례함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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