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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희 Dec 12. 2020

05. 나는 당연히 집안일을 잘하는 게 아니야.

내가 너보다 집안일을 많이 했으니까 잘하는 거뿐이야.  

싱크대가 망가지든 법랑 냄비가 망가지든 내 손이 망가지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끌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는데 뭐하나 만 망가지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나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쿰쿰한 곰팡이 냄새였다. 작고 작은 곰팡이 포자들은 마흔 살 넘은 낡은 방의 어두운 구석구석에 꿋꿋하게 자리를 잡아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꼬릿 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닦아주고 약을 발라도 어느샌가 다시 까뭇한 점들이 만들어졌다. 정체를 모르는 그 누군가와 매일 눈싸움을 하는 기분.
밤잠이 없는 남편이 새벽에 전리품처럼 남겨 놓은 라면 그릇과 덜어먹지 않아 뚜껑이 열린 채 말라있는 김치통이 거실에 마련해둔 테이블에 내상을 입은 채 놓여 있다.
하. 한숨에 색이 있다면 이번 한숨은 짙은 회색이었겠지.  
소파에 엉덩이를 대자마자 불룩한 남편의 양말이 느껴졌다. 양말을 손에 집으려 허리를 구부리면 소파 밑바닥에서 메롱 하듯이 빼꼼히 삐져나온 빨간색 물체를 볼 수 있다. 팬티다. 왜 남편은 속옷을 다 벗고 자야 잠이 잘 오는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결혼 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벌어지는 데는 결혼하고 채 3개월이 다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와 잘 맞는다고 느껴지던 부분은 당연하고도 아주 작은 부분으로만 남겨져갔다.
언제였을까? 그가 다 쓰지 않은 치약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을 본 후였을까, 밥을 먹은 후 매번 양치를 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아무것’을 구부려 이를 후빈 후 오물거리는 모습을 본 후였을까. 아니. 그래, 맞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팬티를 입지 않은 채로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형상을 본 직후였다. ‘아우씨, 결혼생활 x 같네’ 란 말이 튀어나온 것은. 쿰쿰한 냄새의 출처가 방 어딘가에 기생하고 있는 곰팡이 냄새가 아닐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리고 그날은 어깨가 유난히 아픈 날이었다. 너저분하게 늘여져 있는 그의 운동화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뛰어넘어 현관을 지나니 그가 소파에 깊숙이 널브러져 티브이를 보고 있다.  식사를 하지 않은 채였다.
아니 왜?
그래, 나 역시 저녁 전이므로 기왕 먹는 식사 2인분을 준비하면 된다. 서둘서 손을 씻고 엄마가 소분해 준 한번 식사분의 청국장을 물에 불린다. 엄마가 준 김치통에서 김치를 양껏 덜고, 엄마가 함께 보내준 멸치조림을 작은 접시에 덜어낸다. 반찬이 너무 없네.. 브로콜리를 삶는 동안 계란을 풀어 소시지를 부친다. 하. 이번 한숨은 형광핑크색이다. 그날의 저녁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쩝쩝쩝쩝. 쩝쩝쩝쩝. 쩝쩝쩝쩝. 쩝쩝쩝쩝.  그리고 다시 쩝쩝쩝.
이제 그만!
그의 눈이 휘동 그래 졌다. 이유를 알 길이 없다는 듯 휘동 그래진 그의 눈을 보니 나는 더욱 마음속 지랄이 꿈틀거렸다. 식사를 조용히 마무리할 수 있을까. 내가 오늘 하루를 노멀 하게 끝낼 수 있을까. 저 쩝쩝거리는 소리만 사라져 준다면?

밥을 다 먹은 그는 또다시 팬티만 입은 채로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본다.  고무장갑을 끼는 게 왠지 지루하게 느껴져 맨손으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쏴아. 물을 틀고 그릇을 비벼댄다. 콧물이 나온다. ‘꼭 이런 때만.’ 세재 거품을 대충 바지에 닦고 콧물을 닦지만 또 나온다. 눈물이 나오려니 콧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남편이 설거지를 한적도 있지만 그가 씻어 놓은 컵과 그릇들은 세재가 다 씻겨나가지 못해 미끄덩 거리거나 혹은 고춧가루나 밥알 같은 잔여물들이 늘 남겨져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걸까? 에이 설마.
사실 나의 깐깐함이 그로써는 답답했을 것이다. 설거지 깨끗이 하기도 실력이라면 왜 그의 설거지 실력은 이렇게나 늘지 않는지 나로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밖에서도 이렇게 어리바리하니?”
“단지 설거지일 뿐이잖아.”
“이상하네. 군대 가면 남자들도 설거지 다 한다던데.”
나의 주절거림에 그가 답한다.
“잔소리하지 마. 각자 잘하는 걸 하면 되는 거지.”
팬티만 간신히 얹어져 있는 그의 엉덩이가 실룩거리며 다시 소파를 향한다.
손에 물기를 다 닦지 못한 채 그에게 가서 말을 했다.
“밤에 먹은 라면 그릇 정도는 설거지해놔야 하는 거 아니야? 저녁에 밥을 안 먹고 나 기다리고 있는 건 나보고 차리라는 거야?”
그는 건드리면 투견이 되고 건드리지 않으면 노견이 되는 카멜레온 같은 남자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는 핏불테리어가 되어 미간을 찌푸린다.
“하루 종일 쇠가 빠지게 일하고 왔는데 잔소리하지 말라고 했지!”
“너만 일하는 거 아니야. 그놈의 쇠 빠진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투견끼리의 싸움에서 승자가 있을까? 내상을 입은 채 다시 돌아온 자리는 그저 싱크대일 뿐이다.
하. 이번 한숨은 그야말로 짙은 녹색이다. 다시 물을 틀고 세재 거품을 헹궈 나간다.
툭. 투둑. 툭. 콧물이 코피처럼 싱크대를 적신다. 그리고 내 이성의 근육이 끊어져 그 끝이 나달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빡빡 빡빡.
법랑 냄비를 싱크대에 내려쳤다. ‘녀석 제법 튼튼한 아이였는데. 안녕.’ 그 와중에 이 녀석이 얼마짜리였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결국 내 생각은 가격 유추에 실패했다. 그전에 냄비는 찌그러졌다. 폭발할 것 같은 가슴이 손모가지로 전해졌다. ‘싱크대가 냄비보다 강하구나.’ 싱크대는 아무 흠도 안 남을 거 같다. 갈라지면 어쩌나 했는데.
그 와중에 어쩐 일로 카멜레온 같은 그가 노견으로 색을 바꾸었다. 아무 일에도 흥미가 없는 듯, 아무 일에도 놀라지 않는 듯 티브이에 시선을 던질 뿐이다.

“나는 당연히 집안일을 잘하는 게 아니야! 단지 내가 너보다 집안일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잘하는 거야!”

그가 알아들었을까. 진심을 담아 큰소리로 던진 말이었는데. 그렇게 대구에서의 외로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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