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섬같은 사무실에서 오메가들의 생존법
“지금 회사 농구대회 중이에요."
회사 뒷편 농구코트에서는 응원하는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대학교에 돌아온 듯, 생기가 넘치는 풍경, 실로 다른 세상이었다. 인사팀의 안내를 받아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사무실.
2번째로 들어간 회사였다. 어떻게든 적응을 해야한다고 다짐한 나는 최소 3년은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입을 악물었다. 2년간 스파이더 센서처럼 분위기 센서를 가동시켰다. 사무실에서는 두가지 공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노조가 있는 회사. 거대한 조직이라는 우산 속에 너무 커서 망하지 않을꺼야라는 온기가 흘렀지만, 또 한편으로는 급변하는 변화 속에 공룡도 죽을 수 있다는 폭풍전야 같은 냉기도 같이 흐르고 있었다.
두 개의 회사를 합쳐 한개의 통합법인으로 출범한 회사. 사무실에는 하나의 조직이었지만, 두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확연히 달랐던 두 회사의 급여만큼이나, 다른 두 회사의 사람들은 성향도 달랐다. 공격적일만큼 적극적인 2위의 회사출신의 사람들과 협의와 합의를 중시하는 시장내 1등이 회사사람들, 그 둘은 하나의 조직안에서 부딪치며,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나? 나는 그 두개의 그룹 어디에도 끼지못한 존재였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버스 창밖에 보이는 밤섬같은 존재. 그 섬에서도 홀로 살아남았다던 영화 김씨표류기의 김씨가 바로 나였다. 두개의 그룹이 충돌할 때면, 장마철 제일 먼저 잠기는 밤섬처럼, 파편은 나에게로 튀어 나는 잠겨버렸다. 의욕은 앞섰지만, 정보력은 뒤쳐졌고,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두 그룹 어디에도 마음에 들지 못하는 시간들이었다.
전전긍긍을 하고 있던 내게 신기한 2명이 있었는데, 울버린과 철인28호였다. 그룹 계열사에서 스카우트된 울버린과 홍콩법인에서 얼마전 복귀한 철인 27호. 그들은 팀에서 그럭저럭 생존하고 있었고, 나름 둘은 친해보였다.
첫번째 인물, 울버린 K과장, 이 사람은 회사에서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주 놀림도 받았는데, 무슨 이야기라도 하라고 회의 중에 핀잔도 받고, 재미없다고 회식 중에 놀림을 받는 이 사람. 근데 특이하게 얼굴에 여유가 묻어났다. 주변의 핀잔과 놀림에도 울버린의 상처치유능력처럼, 바로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자기 페이스를 찾는 사람. 울버린.
두번째 인물, 철인28호 L과장. 이 사람은 180cm가 넘는 키에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체육특기생 타입이었다. 홍콩에서 복귀해서 그랬는지, 에너지가 넘쳤지만, 두 개의 그룹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애매한 타입이었다. 하지만, 항상 웃고 다니던 인물이었다. 국내 법인보다 해외법인 사정을 잘알던 인물. 철인28호.
점심시간을 빙자한 카운셀링의 시간, 1층 로비에서는 대졸신입사원들이 노래와 율동에 열심이었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노래의 전주가 지나, 후크파트가 다가오면 다가 올수록, 빨리 지나쳐야겠다는 마음이 급해지는 시점. 사람들의 인파들 속에 결국 보아버린 허공에 몸짓들. 둠짓둠짓 자꾸 떠오르는 내 기억의 잔상들도 같이 떨쳐내고자, 비오는 사무실 빌딩을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남자 3명이 유기농 샐러드 식당에 모였다. 팀장들은 절대 오지 않을 청정지역이다. 3명이 모이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물소마냥 천천히 씹어도 잘 내려가지 않는 런치샐러드 세트를 시키고. 물을 곁들여 겨우 채소들을 쑤셔넣고 있는데, 울버린이 얘기했다.
"점심시간을 보면 우리팀 서열이 나와요. 맨앞에 가는 상무와 그 옆에 팀장, 늑대로 치면 알파와 베타죠. 그리고 그 뒤를 쫒아가는 호시탐탐 베타의 자리를 노리는 중간무리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뒤따라가는 우리 셋. 흐흐흐" 그 오메가 안에서도 나는 맨 끝 서열. 사냥물의 맨 마지막, 뼈에 붙은 고기를 떼먹는 가녀린 늑대 한 마리가 떠올랐다. 닭가슴살이 목에 턱 막혀오는 느낌. "한동안은 버틸 수 밖지." 철인28호가 기다린 듯 이야기 했다.
"우리 같은 오메가들은 에너지를 관리하는게 중요해요. 언제든지 위로 올라가야 하니까요." 철인28호가 이야기하자 "때를 기다려야죠. 흐흐흐" 울버린은 맞장구를 쳤다. 맞았다. 나는 하루종일 회사에서 눈치를 보다보니, 집에 가면 늘 파김치가 되었었다. 에너지 관리. 이거 새로운 이야기였다.
"일단 에너지 마이너스를 정리해봐요. 쭉 리스트로 만들어가지고, 하나 둘씩 플러스로 바꿔봐요. 흐흐흐." 이것이 울버린의 상처치유능력의 비밀인건가? 너무 싱겁지 않은가.
"지금 회사는 알파를 노리는 베타들이 서로 경쟁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요. 그런 때일수록 오메가들은 때를 보며 지내야죠. 자칫하면 무리들 속의 긴장감은, 가장 약자인 오메가를 향해 분출되거든요. 그럼 집단으로 오메가를 공격하는 거죠. 한 무리의 늑대들이 늑대 한마리를 집단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그럼 죽거나, 무리를 떠나야 되니까. 흐흐흐" 벌써 샐러드를 다 비운 울버린.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잠시 남은 치커리를 먹을까 말까, 휘젓고 있는 내게 철인28호가 이야기 하나 해줘도 되냐고 물었다.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라이프가드에게 중요한게 먼지 알아?"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
"원래 물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가장 중요한 게 막기와 풀기거든. 물에 빠진 사람 매우 위험하다는거 알지? 죽을 힘을 다해서 나를 바다 밑으로 끌어 내려. 그러니까 그 사람한테 다가갈 때는, 잡히지 않게 막고, 잡혔으면 빨리 풀어내야 서로 살 수 있는 거야." 이건 또 무슨 선문답 같은 이야기일까? 의뭉스런 내 얼굴을 보며, 철인28호가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너무 바짝 다가가지 말라고. 막고 풀기. 알지?"
비록 내가 점심값은 내가 다 내기는 했어도, 이건 뭔가 수확이 있는 모임인 건 사실이었다. 사무실에 나의 에너지의 마이너스 리스트를 정리해보았다.
[나의 에너지 마이너스 리스트]
1. 이른 기상시간
2. 만원 지하철
3. 잘하겠다는 업무 욕심
4. 사물실에서 보는 눈치
5. 체중 증가로 체력저하
6. 늘어나는 허리사이즈, 자신감 하락
7. 자기개발을 못하고 있다는 불만
8. 외모
[나의 에너지 플러스 솔루션]
(1-2번) 회사 앞으로 이사
원래도 생각해봤던 거였지만, 집을 회사 앞으로 이사한 것이다. 1번과 2번이 해결이 되었다. 물론 신용등급이 내려갔지만, 회사앞 도보 10분거리로 이사를 하자, 더 이상 아침에 이른 시간에 일어나지도, 2시간동안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울버린도 옆 단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3-4번) 막기와 풀기로
그동안 나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무조건 빨리 다가가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같이 물에 빠져 죽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였나, 업무를 받으면, 무조건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지금 나의 위치는 오메가다. 난 무엇을 만들 수도, 바꿀 수도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주변의 눈치도 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씩 업무를 배우게 되었다.
(5-6번) 운동의 시작
출근 전 수영장에 가게 된 나. "수영을 하면 땀이 안나서 좋지 않나요?" 바보스러운 질문을 처음에 했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수영을 하면 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는 사실을 알게고, 땀이 나지 않는것도 맞음을 알게 되었다. 서서히, 허리사이즈가 줄면서, 이제 바지도 사입게 되었다.
(7번) 전화영어 공부
철인28호가 소개시켜 준 전화영어에 가입하고는, 업무시간에 조용히 나가 매일 20분씩 전화영어를 시작했다. 교재없이 매일 날씨 얘기, 회사 얘기, 영화본 얘기, 여행얘기, 마트간 얘기를 했다. 내가 한 농담에 선생님이 어떤 말을 하는지, 노트에 적어 두었다가, 다음날 다른 선생님에게 써먹어 보았다. 선생님들이 한 내용을 내 입으로 써먹어보다가, 먹힌다 싶으면, 계속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매일 농담을 거진 3달간 하다보니, 영어가 자연스러워졌다.
(8번) 헤어스타일은 바꿀 수 있다.
영국 사회학자 캐서린 하킴은 '매력 자본'이란 책에서 시각요소가 중요한 이 시대에, 우리 자신이 지닌 지금에서 최대치를 연마하는게 중요하다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 자본이 작거나 없는 상태다. 하지만, 난 스타일은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시작은 헤어스타일이다. 8천원 블루헤어클럽만 다니다가 용기를 내어 바버샵에 들어가서 상담을 받았다. 그리고,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 아내를 따라 피부과도 같이 갔다. 어느날인가 회사에서 내 이름은 몰라도 '아 그 머리한 얘'로 불리고 있었다. 그게 내 최대치였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냐고? 나의 랭킹은 조금씩 위로 올라갔던 것 같다. 물론 울버린과 철인28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처음에 다짐했던 3년을 넘어, 5년을 그 곳에서 버틸 수 있었다. 빙고! 그 정도면 된거 아닌가. 여러분도 할 수 있다. 월요일 아침 모두에게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