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다니세요가 아직도 중요한 지금
“난 착한 사람은 필요없어”
피선생이 내게 처음으로 했던 말이다. 한창 직장인 왕따로 힘든 날들을 보내다가 운좋게 3개월의 해외파견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자, 인사팀은 해외법인 경험이 있는 인력이 필요하다며 나를 해외사업본부 관리팀으로 발령을 냈다. 금의환양은 아니더라도 옛집에 온 기분에, 조금은 들떠있던 내게 찬물을 뿌리듯, 피선생은 회의실에서 담담하게 내게 이야기했다.
“항상 숫자로 이야기하고, 직급에 맞는 퍼포먼스를 내줘”
피선생은 그야말로 업무중심적인 리더였다. 사적인 잡담은 싫어했고, 사내정치는 혐오했다. 당연히 나의 환영 회식도 없었다. 회식을 싫어하는 나야 대환영이었만, 다른 팀원들이 아쉬워했다. 백산수 1.5리터 페트병에 물을 채울때만 그는 잠깐 자리를 비웠다. 그저 회사에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일만했다. 새로운 내 책상은 그의 왼쪽 옆자리였는데, 이전 팀장들은 늘상 미팅이나, 티타임이다해서 자리를 비웠는데, 피선생은 항상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가 신기하고, 또 이상했다.
점심을 안먹는 피선생
피선생이 점심을 먹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그것도 개인의 선택이니까. 대신 매일 점심메뉴를 골라야 하는 지난 날의 수고가 덜었다고 나는 홀가분했다. 그는 점심시간에도 일을 했다. 오전에 보고서를 메일로 보내놓으면, 점심시간 마치면, 그의 수정의견메일이 성실하게 와있었다. 업무속도가 회사보다 빠른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 것 때문일까, 나도 고스란히 일만하게 되었다. 나는 그와 잘맞는 구석이 있었는데, 피선생의 자리에 앉아, 내가 이야기 하면, 피선생은 이면지 뭉치를 앞에 두고, 연필깎기에 스테들러 연필을 넣고 돌렸다. 초등학교 때 들어보고, 오랫만에 듣는 연필깎는 소리. 슥삭슥삭, 중구난방 생각드는대로 내가 이야기하면, 그는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고개를 저으며, 듣다가, 슥삭슥삭, 비슷한 것은 모으고, 다른 것은 나눠서, 도형화를 했다. 슥삭슥삭, 괜찮은 장표 하나가 나왔다. 말이 도형과 그래프가 되었다. 그럼 난 그 이면지를 들고와, 문서로 만들었다. '어~이거 재밋잖아’. 조금씩 만든다는 게 뭔지 알것 같았다. 일의 재미를 느꼈다.
사무실 불문율
"팀장은 모여서 팀원을 이야기 하고, 팀원들은 모여서 팀장이야기응 하지." 우선 그를 뭐라도 불러야 하는데, 별명이 없었다. 따로 부를만한게 필요하다. 그래서 아이데이션 을 하던 중 '미스터 피바디'라는 천재 강아지가 떠올랐다. 아이큐가 800에 달하는 천재 강아지, 이거다. 그 때부터 우리는 그를 피바디 선생, 피선생 또는 예우를 갖추어서 피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피선생과의 사무실 생활은 좋았지만, 공석인 본부장 자리가 늘 문제였다. 누군가 온다고 말은 많은데,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조직의 장이 없으면, 업무상 여러가지가 불편해지기 마련이었다. 임시로 피선생이 겸직인 상태가 오래갔다. 나를 포함한 팀원들은 피선생이 본부장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익숙함을 추구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회사원들.
피선생의 승진소문
피선생이 승진해서 본부장이 될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때 그룹에서 S그룹을 따라가야 한다며, S사 임원들을 대규모로 스카우트 할 때가 있었고, 그때 한 임원이 데려온 S사 출신의 피선생, 그를 안시킬 이유는 없었다. 다만 걸리는 건, 그가 전에 있었던 EU법인에서 본사로 돌아온 이유였다. 당시 법인장과 의견충돌이 있었고, 그 때문에 한국 본사에 오게되었다는 것이다. '점심을 안먹으니 거기서도 문제가 됐겠네.' 듣다보니, 정황이 이해가 갔다. 다만, EU법인 매출이 국내 다음으로 높고, EU법인장이 차기 대표로 온다는 소문까지 있었으니, 그냥 멈어갈 문제는 아니였다.
해외법인발 소문
피선생은 공대출신이었다. S사에서 넘어와서 IT전략팀장을 맡았고, EU법인에서 ERP프로젝트를 안정화하다가 본인이 현지에 안정화 된 케이스였다. 그러니까, 영국 현지상황을 본사에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게 그였던거다. 현지 법인의 경영실적을 체크하는 관리팀의 입장상, 해외법인에게 칭찬보다는 늘 쓴소리를 해야하는 자리. 그는 내게 그랬듯, 항상 숫자로 물었고, 숫자로 답하라고 질문했다. 답이 오면, 본인이 숫자를 찾아 다시 물었다. 깐깐한 시어머니 같은 피선생은 현지법인들에게는 힘든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피선생이 현지법인들을 관할하는 본부장이 된다니, 법인장들이 걱정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인재가 없어요.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없어요"라고 달고 사는 인사팀, 그 많은 회사 사람들 중, 자리에 맞는 사람 한명이 없다는 건, 아이러니였다. 연예인 걱정처럼, 그래 발령 생각은 잊고 내가 하던 일이나 잘하자라고 하던 어느 날, 발령소식이 들려왔다. EU법인 김대장이 본부장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김구 선생님의 젊은 날을 그린 대장 김창수라는 영화에서처럼, 동그란 클래식 안경을 써서,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문제는 EU법인에 있을때 피선생의 후임이 김대장이었는데, 이제 순서가 뒤바껴서 김대장이 상사로 오게 된 것이다. 조금 뒤에 사람이 좋기로 유명한 김대장을 해외법인들, 그 중 EU법인장이 본사에 압력을 넣어, 본부장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열정보스 김대장과 피바디 선생의 사이에서
김대장은 그야말로 필드에서 뛰던 현장형 보스였다. 본사 뿐만 아니라 계열사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형. 피선생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부임한 당일부터 우리와 점심을 먹기 시작했으니, 다를 수 밖에. 아주 크게 달랐다. 대장 김창수와 천재개 피바디의 만남 사이에서, 우리 내부 조직의 균열은 당연했다. 피선생보다 나이가 2살 많았던 김대장은 90일내 조직을 장악하라가 아니라, 아예 10일 만에 조직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11일째 김대장은 피선생과 나를 불렀다. 해외법인별 목표부터 높이자고 했다. 그룹 내 회사 목표를 맞추려면 당장 모든 목표부터 높여야 하는게 아니냐고 그는 말했다. 그룹 목표를 달성하기는 이제 그른것 같다는 거 모두 다 알고 있지 않냐는 이야기가 턱밑까지 나왔지만, 그것을 회의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별나라에서 온 그대처럼 그룹의 목표 달성을 이야기 했다. “300% 목표로 올려야 150%라도 어떻게든 만들수 있고, 결국 50%는 목표를 더 달성한 거 아닌가요?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다들은 몸 사리고 있는데, 80%~90%선에서 만족해서는 안돼지.” 나는 그날 사내 방송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실제로 얘기하는 사람을 만났던 거다. 그는 “더 중요한건 뭔지 알아요? 목표 대비 달성율이 저조해야 인센티브도 아낄 수 있다고. 그래야 우리가 걔네들을 더 쫄수 있는거고..”
피선생은 “현지법인에게 무조건 높인 목표를 할당한다는 건, 안됩니다.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상품 밀어내라라는 뜻인 겁니다, 결국 단기 목표 달성하자고. 중장기 목표가 희생되는 거라고요. 차라리 구조개혁이나, 효율화쪽으로 방향을 잡고 개량지표를 만드는 걸로 추진하시죠.” 김대장은 한마디로 회의를 마쳤다. "토론을 하려고 여러분을 부른게 아닌디, 그냥 하세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가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바꾸게 한다가 맞다.
해외법인들은 깐깐한 피선생을 피하려다가, 친화형이라고 알고 있던 대장 김창수를 만났고, 좀 나아질까 싶었던 희망은 두배 또는 세배가 뛴 따끈따근한 경영목표와 함께 무참히 깨져버렸다. 영화 곡성의 곡성이 전화기 너머로 세어나와 내게 울려퍼졌다. 목표가 올라가니, 분기별 인센티브는 사라졌고, 이제 그런게 있었는지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왜인지도 모르는 비상과 위기 사이에서, 매월 곡예운전을 했다.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대책과 솔루션이 이메일로 던져져 나왔다. 그리고 그 대책의 대책이 꼬리를 물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하다.
김대장이 전체 메일을 보냈다. 해외법인들과 모든 스탭들에게, 첫 머리가 '항구에 정박한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묶어 두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존 A세드의 명언. “짜증나” 내 뒤에 있던 김대리가 조용히 읉조렸다. "정박을 해야 기름칠도 하고, 정비도 할것 아니야"라는 항의전화는 만만한 내 전화기로 쏟아졌다. 일하기 힘들다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올수록, 현지 직원 누군가가 그만두엇다고 할 수록, 무플이 악플보다 무섭다던 연예인처럼 김대장은 회자되고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수록 유명해지는 것처럼 사내에서 유명해졌다. 대표의 오른팔이 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해외법인이 변했다라는 대표의 멘트가 주간 회의록으로 볼릭으로 강조돼어 공유되었다. 김대장이 연말에 임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돌았다.
피선생과 나
김대장이 시킨 일은 단순한 것이었다. 실적을 더 끌어올리는 일, 비용을 더 줄이는 일, 목표를 더 높이는 일이었다. 목표는 내년은 높고, 내후년은 더 높아질꺼지만. 결론적으로 그걸 하기 만드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하기위해 나는 매일 담당자에게 대책을 미리 맡겨둔 것처럼 당당히 메일을 쓰고 퇴근했다. 8시간 후에 메일이 회신되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저 증거로 남겨둔다. 그리고, 다음날 전화를 해서 독촉을 했다. 나는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된건가? 나는 마른 오징어를 짜서 더 엑기스를 만드는 하는 건가? 자책했지만 그래도 했다. 단기 목표 달성을 위해 1년, 2년 뒤의 하자던 투자는 모두 미뤄졌다. 피선생은 더이상 연필을 깎지 않았다. 3개월간 친했던 현지 직원들과이미 무뚝뚝해진 관계가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김대장의 임원승진
그해 초 김대장이 임원으로 승진했다.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쓰린 사람들이 집무실 앞에 줄을 섰다. 승진의 사다리는 높지만, 누군가는 떨어뜨려야 올라가는 동앗줄인건가? 승진 소식과 함께 피선생은 새로 신설된 자회사 IT지원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뭘하고 있을까 나는 곁눈질로 피선생을 보았다. 슥삭슥삭, 그는 오랫만에 연필을 깎았다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팀원들 책상위로 조그만 카드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송별 점심을 같이 못하지만, 그동안 즐거웠다고.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그의 글이 적혀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책상을 보면서, 난 그제서야 알았다"착한 사람은 필요없다"고 덤덤하게 말했던 피선생이, 그나마 이 사무실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착한 게 여기에서 무슨 쓸모람’
회사를 퇴직한 뒤, 나는 아직도 가끔 연락을 받는다. 다들 변화가 필요해, 새로운 환경이 필요해라고 이야기한다. 맞아 힘들지라고 내가 대답하면, 꼭 그 다음에 물어보는 질문은
"그래서 지금 어느 회사에 다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