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릴 수는 있어도 숨길 수 없는 것
내가 5살때라고 했다. 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와 같이 간 오래된 목욕탕, 온수는 빨간색, 냉수는 파란색, 두 가스벨브처럼 생긴 레버를 열어 물온도를 맞추는 방식이었다. 어린 마음에 빨간색, 파란색을 열고 닫는게 신기했는지,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사이 물을 틀었다가 머리에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 머리에는 아직 그날, 화상의 자국이 남았다. 엄지정도의 땜빵으로 말이다. 중학교 때 두발규정 앞뒤 3cm. 머리를 자르니, 검은머리에 하얀 땜빵이 도드라져 보였다. 남자중학교, 친구들이 놀려될까봐 검정색 싸인펜으로 땜빵에 칠을 하곤 했지만, 곧 지워졌다. 땜빵은 가릴 수는 있어도 숨길 수 없었다. 그 뒤에는 놀림을 받아도 그냥 다녔다.
팀장이 나에게 소리쳤다.
왜 미리 이야기를 안했어?
1인 생활용품 자체 PB(Private Brand)상품의 PM이었던 나는 당황했다. 그 날 오전에 협력업체중 한곳 이사가 전체메일을 보내왔다. 우리와의 PB공급계약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겠다는 메일이었다.
팀장은 놀라서 출근하자마자 그 회사 이사와 통화를 하고, 사건의 전황을 듣고는 화가 난거였다.
기분 나빠서, 참여안하겠다는데, 메일을 왜 그렇게 쓴거야, 나한테 미리 얘기했으면, 설득이라도 해보던가, 다른 건 다 이야기하면서, 그건 왜 또 빼고.
팀장에게 나는 이런 저런 업무이야기를 격이없이 할 수 있던 친한 사이였지만, 그 이야기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임대리와 하사원, 그리고, 최디자이너, 개발자 고과장, 나를 포함 이렇게 5명이 PB런칭을 담당하고 있었다. 김대리가 처음 제안한 기획자였고, 리더가 없는 상태에서 PB상품을 이끌어왔다. 팀장은 런칭 준비를 위해 시니어가 사업을 봐줘야 한다면서, 나에게 PM을 맡긴 상태였다. 일욕심이 많은 임대리와, 싹싹한 하사원,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일적으로 티격태격은 했지만, 런칭을 앞두고 모든게 순조로웠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1인 가구 브랜드 구색을 맞추다보니, 5개 카테고리가 나와야하는데, 1~2개의 카테고리가 계속 계약이 안돼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실무자인 나와 김대리는 시간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여러 메일이 오갔고, 전체 컨셉시안, 디자인 페이지가 나오는 사이, 나와 김대리는 업체를 알아보려 다녔다. 전체 PB브랜드 런칭을 위해, 나를 포함한 실무담당자,업체 담담자, 디자이너, 개발자 이렇게 메일 수신자가 참조를 포함하면 3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매일 또는 이틀에 한번꼴로 공지메일, 컨펌메일 가는 동안. 겨우 알아온 업체가 돌연 못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고, 나는 대안으로 생각한 다른 회사를 설득해서, 결국 참여의사를 받았다. 그 날 모든 업체가 셋팅이 되는 날, 최디자이너, 개발자 고과장, 하사원, 임대리에게 메일을 썼다. 브랜드 다 채우느라 고생했다는 내용, 그리고,
P.S로 땜빵채우느라 고생하셨네요. 다들.
그 문장이 문제가 될줄을 몰랐다. 그 이후로 여러 공지, 컨펌 메일을 썼고, 김대리가 답장으로 쓰다보니, 내가 보낸 그메일을 전체 답장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답장,답장,답장안에 들어간 그 땜빵채우느라 고생하셨네요. 다들이라는 문구를 대안으로 선택했던 그 업체 팀장이 보았고, 그걸 이사에게 이야기했다.
그 전부터 반신반의 했었던 업체는 내게 항의했다, 자신들을 땜빵이냐며, 자신들의 상품이 땜빵이냐며,항의를 해왔다.
처음에는 나는 영문을 몰랐다. 그리고, 메일을 살펴보았다. 위로 올리고 올려, 내가 쓴 그 메일은 찾았다. 김대리가 내가 쓴 메일에 전체 답장을 다음날 보냈다. 브랜드 판매전 브랜드 로고파일을 공유하는 메일이었다. 거기 위에 내 메일이 있었던 거였다. 대등하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업계의 밸류체인상, 나는 조금 귀의 갑의 위치였지만, 그 메일을 보고 난 뒤, 나는 바로 을이 아닌 병과 정이 되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나의 실수였다. 정신이 번쩍, 눈앞이깜깜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핸드폰을 들고, 다시 로비로 나가 연신 고개를 숙여가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런칭을 앞두고 업체하나를 잃게된 상황, 그런 런칭일정도 뒤로 밀리게 되는 문제를 만든 건 나다. 그 다음날 팀장과 나는 그 회사로 찾아갔다. 팀장은 회사 앞 꽃집에 들려 꽃다발을 들고 말이다. 나는 90도에 가까운 인사를 하며, 그 쪽 팀장과 이사님에게 사과를 했다.
큰 실수를 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희는 귀사의 상품이 땜빵이라고 생각한 적이 절대 없습니다. 팀장은 옆에서 꽃다발을 팀장에게 주며, 자신도 챙기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책임을 물어 이과장은 PB PM에서 빼겠다고 덧붙였다.
나와는 상의된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마무리가된 내 메일사건 이후로, 나대신 임대리가 사업의 PM이 되었다.
과장님 왜 그러셨어요. 내가 카달로그 시안을 임대리에게 주자, 임대리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 느낌이 묘했다. 하지만, 넘어갔다. 업무 메일에 농담조로 친근하게 적은 P.S를 적은 내가 100% 잘못한 것이었으니까, 그 메일을 회신했던 임대리에게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PM을 맡을 임대리를 보면서,
나 때문에 일이 많아졌다. 미안해.
조용히 정리하고 말았다.
1인 가구 PB브랜드 매출은 소위 대박이 났다. 회사에서 좋은 아이템이라고 밀어주는 것도 있었지만, 최초의 1인 생활용품 브랜드였고, 마케팅도 2030층을 타켓으로 재밌게 만들어서, 바이럴도 되었다. 내가 진행했던 아이디어가 실현이 되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물론 PM으로가 아니라, 지켜보는 입장이라 아쉬움도 있었다. 임대리가 연말에 대표사원상으로 수상자에 호명되었을 때, 내 일처럼 응원의 박수를 쳤다. 임대리는 수상소감으로 상을 수여해 준 대표이사를 최연소로 다는게 꿈이라고 밝혔다. 일욕심이 있는 친구이니, 그럴만도 하다는 주변의 평이었다. 임대리는 다음년도 1월 특진으로 임과장이 되었고, 영국으로 1년간 지역전문가로 나가게 되었다. 공채 동기들 중 제일 먼저 단 과장, 해외장기파견이었다. 회사에서는 그를 초격차 인재로 관리된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다.
임대리가 과장을 단 그 해에, 나는 글로벌로 부서를 옮긴뒤,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기 바빴다. 어느날, 협력사의 도차장을 우연히 회사에서 만났다. 같이 업무를 햇던 도차장은 경쟁사로 자리를 옮겼다며, 인사를 온것이다. 나는 반가운 그를 데리고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리고, 도차장과 여려가지 이야기를 하다, 임대리의 이야기가 나왔다.
근데 과장님, 혹시 그거아세요, 이런 이야기 드리는 거 좀 이상할 수 있지만. 우리 브랜드 런칭 마치고, 협력사랑 다 같이 술자리 할 때, 물론 과장님은 안오셨지만, 임대리가 술취해서 그러더라구요. 과장님 자기가 재꼈다고. 자기는 마음에 안들면 윗사람도 보낸다고, 자기한테 잘하라고 말이죠.
화나는 것은 화나는 대로, 일은 일이다. 영국에 있는 임대리와 나는 카톡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냈다. 나는 인사팀과 같이 각 국가의 지역전문가들에게 과제도 내주고, 피드백도 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메일 사건이 있은 뒤로는 업무용 이메일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모티콘도, 농담조도 전혀 쓰지 않았다. 전체회신이 되어 있는 긴 메일도 중간중간 꼼꼼히 보는 버릇도 생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개월 뒤 미국 주재원 공석이 예기치 않게 생겼다. 인력풀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임과장이 영국에서 바로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라, 1순위로 오르내렸다. 임과장이 카톡이 왔다.
과장님, 오늘 미국 법인장님이랑 인터뷰 했어요. 잘좀 부탁드려요.
뚜-뚜-
나는 미국법인에 전화를 걸었다.
근데 나는 알고 있다.
땜빵은 가릴 수는 있어도, 숨길수가 없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