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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인드박 Aug 26. 2019

파리탈을 쓴 사나이

자나 깨나 말조심하고 볼 일

"우리 지금 파리날리고 있는거네요?"

장부사장이 스크린 화면을 보고 조곤조곤히 얘기했다.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하향곡선이다.

".......네"


화산 폭발이 머지 않았음을 느끼는 폼페이의 시민들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그저 뭔가 크게 터질 것 같은 불길한 기운에 도망쳐봐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을 직감한 것일까? 


"그럼 뭐라도 해야할거 아니야!"

화산 폭발. 폼페이의 베수비오 화산은 갑자기 폭발했고 도망칠 새도 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용암과 화산재에 폼페이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폼페이의 시민들. 뭔가 터질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않아서 재가 되었다.


발표 스피커인 하팀장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했지만, 대회의실 구석 맨끝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밖에 사무실 직원들의 눈길이 이 회의실에 모아지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나마 끝자리인게 다행이다 위안을 삼았다. 안전거리가 확보되었지만, 공기는 이미 얼어붙어있었으니 난감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부사장이 이야기한 '해야할 거 아냐?' 이건 의문문인가, 감탄문인가 아님 명령문인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니, 명령문이다. 그렇게 적자.'


"그럼 뭐라도 해야할것 아닙니까? 시장을 뒤엎는 것, 상식을 뒤엎는 것, 차라리 파리 날린다고 해, 우리 지금 파리날립니다. 이렇게" 부사장의 샤우팅이 이어졌다.

".......네"


폼페이의 화산재를 덮어쓰고 5명이 모두 나왔다. 다행히 모두 팔다리는 쓸수 있었는데, 영혼은 날라가 버렸다. 탈탈 털리고 나온 5명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가 진격의 거인이라고 불렀던 하재관 팀장은 농구선수 출신이었는데, 오늘따라 190cm의 키가 쓸데없이 크게 보였다. 사실 나는 그 회의의 사관이었다.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쓰는 것처럼 노트북을 들고 회의록을 쓰고 있었다. 노트북에 얼굴을 파묻고, 귀만 쫑끗 세운 채, 언제든 바스락 소리만 나면 뛰어갈 준비가 되어있는 흡사 멧토끼와 같이, 회의 발언 하나 하나에 귀를 움직였다.


내가 들어간 3번째 회사, 던전같은 두번째 회사를 탈출하고 어떻게든 적응을 해볼까 하는 회사였다. 그 회사에는 회의록 시스템이란게 있었다. '적자생존, 즉 적어야 생존한다.'는 감옥에서의 깨닮음으로 출옥하신 회장님은 모든 회의에는 회의록을 써서 남기자는 명을 내리셨고 부지런히 각 계열사별로 실행이 되고 있었다. 회의록 포맷을 다운로드 받아, 회의 참여자중 지정된 1명이 회의록을 쓰고 업로드 하는 시스템. 당연히 회의 참석인원들 중 제일 막내가 적게 된다. 의도는 좋지만, 막내들에게는 또다른 일이 되었다. 합리적인 시스템도 사람이 만들지만, 불합리와 비효율도 사람이 만든다. 입사하자 마자, 회의록 담당이 된 나는 시스템에 올리기전 부서장 거인 하재관 팀장의 승인이 받아야만 했다. 한번에 통과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부끄럽게도 회의록을 쓰느라 야근까지 하게 이르렀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민감할 일이 아니었지만, 회의록의 단어 또는 문구가 잘못됐다며, 나에게 연락이 오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 본인이 그런 의도로 쓴게 아닌데 잘못 옮겨졌다고 고쳐달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관은 임금조차 함부러 간섭하지 못하거늘, 현대의 사관은 아주 힘이 없다. 고쳐달라면 고치고, 수정한다.



"회의록을 좀 봐주십시요"

하팀장에게 오늘은 말을 걸지 말아야지 싶었지만, 퇴근 시간이 다가오니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회사에서 한 유일한 일인 회의록이라도 잘 마무리 짓고 싶었다. "잘 정리했냐?" 팀장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물었다. 

"...네" 회의록을 시스템에 업로드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총총 내려왔다. 사무실만 나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퇴근만 하며 살고 싶다'.

 

지하철에서 뒤뚱뒤뚱 흔들거리면서, 생각해본다. 사실 누가봐도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었다. 후발주자로 들어간다면, 전면전은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1-2개의 핵심 킬러기능이 있어야 했다. 전략책이든, 경영전략 수업에서든 우리가 배운 선택과 집중, 그 본질은 선택이 아니라 포기인 것이다. 케이스 스터디에서 그렇게 많은 기업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사업을 말아 먹은 건 그 포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경쟁사 대응으로 부랴부랴 준비한 상품은 3개월 뒤 출시되었고, 보란 듯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영업 마케팅 계획을 가지고, 장부사장에게 가서 보고를 했지만, 예상했던대로 대차게 까였다. 하팀장은 이야기 했다. 장상무는 이미 보고 전부터 깔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나는 솔직히 그래도 조금이라도 팔린다는 게 용할 정도였다. 대행사의 소비자 조사, 그리고 온라인, 오프라인 마케팅 제안서는 그냥 문서쇄절기로 직행이었다. 




"우리 진짜 파리 날리니까, 파리로 해볼까요?"

다음날 영업마케팅 대책회의, 도과장인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이야기 했다. 그녀는 내가 쓴 회의록을 프린트해서 보고 있었다. 파리에 동그라미가 빨간펜으로 되어있었다. 평소 똘기가 있었던 도과장은 아이디어가 넘친 분이긴 했다. 

"이 참에 아예 파리를 들고 제대로 해보자고요. 홈페이지 파리를 날려요."

선과장도 아이디어를 보탰다. 

"파리로 캐릭터를 만들어서 바이럴을 하면 어떨까요?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도 만들고, 굿즈도 파는거죠"

나는 회의록을 쓰고 있다가 파리 종류를 구글에서 찾아보았다. '파리 캐릭터를 몇 종류나 만들 수 있을까? 집파리, 침파리...' 

"그럼 바이럴 영상은 파리특공대 어때?. 파리 어벤져스, 파리 종류별로 모여서 지구를 지킨다." 침묵하던 하팀장이 말했다.

"파리탈을 쓰고 사내홍보를 하면 어떨까요?"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던졌다. 

스트레가 너무 심하면, 사고가 멈춘다는 걸까, 아니면 될디로 되라, 막무가내인건가? 그래도 재밌는 아이디어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만담이 이어졌다. 대차게 까이는 것보다는 낫구나 싶었다. 회의록에는 온통 파리가 넘쳐났다.

 



'설마 파리로 정말 할려는 건 아니겠지'나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저기서 진격의 거인이 웃고 있었다. 하팀장은 팀장회의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이야기했다. 

진짜 파리로 한다는 것이다. 

부사장의 이름을 팔았다면서, 예산도 조금 받았다고 한다. 그 날부터 이상한 풍경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재밋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도과장은 바이럴업체를 만나서 영상기획을 구체화 시켰다. 선과장은 디자이너와 파리 캐릭터디자인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온라인팀에 가서, 파리를 어떻게 날릴지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의록, 내가 말한 파리탈을 구해야 했다. 

'자나 깨나 말조심'

파리탈은 예산때문에 만들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과장이 MBC소품실에 연락을 해보라고 하기에, 결국 연락을 했다. 파리탈을 정말 빌릴 수가 있었다. '뽀뽀뽀 모두야 놀자'라고 아직도 방영중이란다. 요즘은 탈은 안쓰고 대부분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한다는 관리자분을 따라, 소품실에서 파리탈을 정말 빌렸다. 탈을 빌려 돌아가면서, 생각이 들었다. 이걸 누가 쓰고 다녀야 되나?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회의록에서 내가 뭐라고 적었던가? 



"간단한 거야. 파리탈쓰고 회사입구에서 인사하면 돼" 

하재관 팀장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팀장은 회의록을 들고 있었다. 내가 쓴 그 회의록. 내 이름으로 하자고 했던 사내홍보 문구에 빨간펜이 쳐있었다. 

'회의록이 노예문서라니'

도과장은 자기가 만든 홍보물을 보이면서 이야기했다. 

파리탈 (출처-문화인형극회) 

"점심시간에 홍보지와 홍보물도 같이 배포해야돼" 

도과장, 사람이 좋게 볼려그래도 좋게 안보였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이 발걸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몸은 천근만근 입사하고 첫 날같은 그런 날이었다.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회사 로비에서 손을 흔들고, 홍보물을 돌렸다. 인형을 쓰니 일단 더웠다. 멀찌감치 떨어진 하팀장과 도과장, 선과장은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파리탈안에는 더웠다. 말도 못하게 땀이 벌써 줄줄 흘렀다. 하지만, 일단 파리탈을 쓰니, 내가 없어지고 파리만 남는 메소드 연기상태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면을 쓰는구나.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거, 파리탈을 쓰고 회사로비를 돌아다녔다. 점심시간까지 임무를 완수하고, 탈을 벗으니, 뭐든 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잠시 들었다.    




그렇게 '파리탈'을 쓰며 즐겁게 일했던 그 상품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잠깐 반향이 있었을 뿐,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지 못했기 그 상품은, 파리처럼 살아남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식 짐을 정리할 때, 그 때 만들었던 홍보물이 가끔식 파리처럼 튀어 나온다. 그럼 나는 대차게 쓰레기통에 버린다. 파리탈은 다시는 쓰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자나 깨나 말조심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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