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버블티

퇴사, 대학원, 그리고 교환학생.

by 데인드박

한국?


녜...하고 대답하니, 나를 앞에 두고 한바탕 회의가 벌어졌다.

한국에서 그 대학원으로 처음 간 학생인 나였다.


나에게 학교측에서 내준 기숙사는 형편없는 곳이었다. 보증금 없이 한국돈 10만 정도만 내면 한방에 6명씩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는데, 목조로 된 오래된 건물,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는 그저 겨우 씻고 잘 수 있는 정도의 시설이었다.


말이 좋아 기숙사지만, 소개해주는 방을 들여다 보니, 임시 노동자 숙소였다. 화장실과 샤워실을 소개받았는데, 관리상태가 엉망인 수준을 넘어 여기 관리를 하지 않는다라는게 쓰여있었다.


날은 더웠고 땀은 나는데, 천장에 붙은 선풍기가 털털털 힘없이 돌아갔다.


여기서는 못살겠다.


머리속이 번쩍했다. 1층 접수실로 내려가 서류를 작성하라는 데, 어떻게해야 하나 망설였다.


근데 한국말이 들렸다. 이건 신의 계시인가, 일단 찌푸라기라도 잡아야한다. 사람들을 비집고는 그 남자옆으로 갔다.


혹시 한국분?

네-

통화중이라 계속 물어보기도 곤란하다.

그래도 지푸라기.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제가 오늘..


아 죄송해요. 제가 짐을 받아야되서..


그리고는 유학생은 접수실을 급히 나가버렸다.

끊어진 지푸라기.


교환학생으로 온 대만의 한 대학원, 한국과 대만 두 학교의 교류체결이 되고 나는 첫 학생이었다. 비행기에서 학교이름만 중국어로 외워서 갔다. 택시를 타고 학교이름을 자신있게 외쳤지만 물론 통하지 않았다.


첫번째 좌절, 중국어가 쓰여있는 서류를 보여주니, 그제서야 알았다며 출발했다. 더블백 마냥 큰 배낭과 캐리어를 짊어지고, 도착한 학교는 너무 컸다. 정문도 나무도 컸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학교는 내가 오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를 앉쳐두고 직원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통화를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제서야 뭔가 결론이 났는지 나를 일단 기숙사로 가라고 한 것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쩔줄을 몰랐다.

내가 대만을 왜온다고 했을까?

간단했다.


돈.

교류체결된 학교에 처음 지원하는 하는 학생에게 준다는 지원금 때문이었다.

비용을 좀 아껴보려다가 낭패했음을 나는 금세 깨달았다.


학교는 컸다. 학교안에는 자전거 가게가 있었다. 자전거를 탈 수 밖에 없는 학교였다. 더위 때문인지, 내 잘못된 선택의 자책인건지, 땀을 소매로 닦으며 기숙사 접수실에서 천천히 설명했다.


못 살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시요.


타국에 온지 몇시간이 안되서 이런 일을 겪으니 앞으로 대만생활이 걱정되며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접수실에 직원들은 나를 앞에 두고 또, 난감해 하더니,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보고 있었다.


오늘의 민폐남이구나.


그리고는 한참 뒤, 나를 불렀다. 다른 기숙사로 가라는 이야기였다. 지도를 보여주며 찾아가라는 데, 찾아갈 엄두가 안났다.


여직원 한명이 안쓰럽다는 듯 나를 데리고 나갔다. 이런 저런 방향으로 설명을 해준다. 이 정도면 내가 알아들은 척하고 놓아줘야 한다.


이건 직장을 그만 둔 벌이야.


혼자 걸어가며 탄식을 했다. 멀고도 먼 학교를 가로질러 나는 무거운 가방과 캐리어를 끌고 걸었다.


이건 속죄의 길이다. 한번도 온 적도 없으면서, 자신만만했던 나에 대한, 사표를 던지고 나온 나에 대한.


대만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땀인지 눈물이지 구분 못하는 뒤범벅된 나의 하루.

학교의 후문에 위치한 담쟁이가 우거진 벽돌건물, 이 건물이었다. 바로 옆에는 자동차가 왔다갔다 하는 도로변이 보였다.


나는 정문에서 후문까지 캠퍼스를 횡단한 것이었다. 1층 사무실에 앉아 땀을 비오듯 흘리며, 직원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딘가 전화를 거는 익숙한 풍경을 체념한 채 나는 기다렸다.


6인실이든 8인실이든, 이제 더 옮길 기력이 없었던 자포자기상태였다. 그리고, 운명인지 나는 2인실로 방을 배정받았다. 선풍기는 힘이 있었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견딜만했다.


살수 있겠다.


짐을 내려놓으니, 창문밖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드디어 실감이 났다. 대만에서의 하루. 길고도 길었다.

룸메이트는 이름과 옷가지가 있었지만, 한동안 오지 않았다.


힘이 빠진 채, 모기에게 뜯기는 것도 모르고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영어소리에 잠을 깼다.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슴은 콩닥콩닥, 두근두근 하는데, 배는 고파서 코르륵.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는 유스호스텔과 같은 분위기였다.


층 전체가 외국에서 온 연수생이나, 유학생들이었다. 대부분이 ABC(American Born Chineses)들, 대만계 미국애들이 대부분이었고, 스위스, 독일, 덴마크, 홍콩, 일본애들이 있었다.


밥을 먹으러 타이페이의 저녁 거리를 걸었다. 첫 날은 계속 걸은 날, 그렇게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은 어리둥절한 날을 나는 보내고 있었다.


모기가 심하게 많았다. 모기장을 제일 먼저 샀다. 이층침대에 보아하니 1층은 이미 룸메이트가 선정한 상태, 나는 2층에 나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밤이 되자, 그제서야 그 날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6인실보다는 낫네.


한국말을 쓰고 싶었지만, 한국인은 나 혼자였으므로, 그저 매일 저녁 9시에 걸려오는 여자친구의 전화만을 기다렸다.


그게 유일한 낙이었다. 광활한 학교를 혼자 걸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났다.


그래 회사 그만두기를 잘했다.


내 룸메이트는 지질학 전공의 독일인 친구였다.


대만에 지진을 연구하러 온 크고 작은 지진 소식에 너무 흥분하며 대만 곳곳을 연구하러 다녔다.


그래서, 나는 2인 1실 방을 혼자썼다. 가끔식 그가 오는 날에는 신발을 가지런히 두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불을 잘 계어두고 나가던 그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바퀴벌레를 비명을 지르던 덴마크 친구의 방에서 가서 바퀴벌레를 잡아주었고, 일본인 유학생들과는 야구경기를 응원했다.


SAT만점을 받았다는 미국 친구와는 컴퓨터 게임을 했고, 그의 친구들과 노래를 불렀다. 주말에는 한인교회에 가서, 남은 반찬을 가지고 왔다.


매주 예배시간을 기다렸다.


대만은 태풍이 자주오는 나라였다. 태풍이 오면 학교도 상점도 모두 문을 닫았다.


여자친구가 보내준 한국 일회용 음식들을 데웠다. 기숙사 친구들과 나눠 먹었다. 중국어를 듣고, 한국어를 알려주기고 했고, 일본어를 듣고 영어로 말하며 살았다.


한국에서 온 첫 학생이었지만, 외국에서 온 첫 학생이다 보니, 수업에서 관심이 남달랐다. 그냥 넘어가는 수업이 없었고, 꼭 끝날 즈음 나에게 질문을 했다.


리, 질문 없나요?


그래서, 수업을 제대로 안들을래야 안들을 수 없었다. 내가 학교의 대표 뿐만 아니라, 나라의 대표가 되다니, 그냥 잘해서는 안됐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질문 시간이 오면, 좀더 고민한 질문을, 다른 동급생보다 좀 더 나은 질문을 하려고 고민했다.


발표때는 자료를 준비하느라 밤을 세웠다. 마지막 시계만 보지 않았다면 완벽한 발표였다고 칭찬도 받았다. 그리고, 발표 슬라이드를 공유해 달라는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 이제 PPT도 Made in Korea다.


학기가 끝날 즈음, 학교 신문에 촬영을 한다며 나를 불렀다. 나를 두고 회의를 하던 직원들이 카메라를 들고 내 앞에 있었다.


캐리어를 들고 땀을 닦고 있던 그 대학원 건물 앞, 그 앞에서 요망한 몸짓으로 V자를 하며 찰깍. 두팔을 하늘로 벌리고 찰깍, 팔짱을 끼고, 스포츠신문 1면에서 보던 느끼한 웃음으로 찰깍, 그렇게 촬영을 했다.


버블티 순서를 기다린다.

요즘 한창 유행한다는 그 버블티, 기다리며 그 시절이 생각났다.


회사를 그만두고, 벌 받는 기분으로 시작했던 그 시절, 버블티는 하루 하루를 견디고, 학교를 가로질러 사가지고 와야했던 나의 일종의 세레모니 같은 거였다.


쉽지 않았지만, 달고 맛있었던 그 시절.

(출처-陳三鼎黑糖青蛙撞奶 페이스북)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끔 보는 식구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