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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보는 식구들이 좋다.

그래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by 데인드박


오늘도 아버지가 집을 때려부섰다. 술을 먹고 들어와 가재도구를 집어던졌다. 2살위인 누나가 있었다. 완력이 안되었는지 말리지 못했다.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렸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꽃았다. 영어독해문제를 풀었다. 하루라도 여기를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공부를 하는 수 밖에,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는 수 밖에. 누나가 나에게 와 소리를 질렀다. 음악소리에 단절 마디가 들렸다. '더 빨리 풀어야 하는데...' 속도가 늦었다.


아버지가 내팔을 끌어당겼다. 무심하게 책상에 앉아있는 내가 괘씸하게 보였는지 방에 팽겨쳤다. 그리고, 나에게 편지를 던졌다. 읽으라고 했다. 몸이 떨렸다. 나는 사실 숨고 싶었던 것인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들었다. 2장의 편지지였다. 연필로 쓴 글씨, 엄마의 글씨체였다. 가방공장에 다닌 엄마는 가끔 냉장고에 메모지를 써서 꽃아두고는 했다.

주로 '국을 대어먹으라', '반찬를 챙겨먹어라'는 맞춤법이 틀린 메모였는데. 편지지에는 글씨가 많았다.

누군가에게 쓴 편지의 답잡이었다.


아버지가 크게 읽어보라고 했다. 엄마는 옆에서 울고 있었다. 심하게 흔들리는 노란 형광색 전구 불빛아래 나는 편지를 읽었다. 어떤 편지였는지 지금은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느 남자에게 호의를 가지고 쓴 답잡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누나를 앉혀두고 술주정을 했다. 엄마가 공장의 누구와 바람을 피웠다고 말이다. 엄마는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젊은 동생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차를 대고 엄마를 미행했다고 도 했다. 바람을 피우는 건 부잣집에서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있는 집에서나 하는 사치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같이 반지하에 화장실도 샤워도 공용으로 쓰는 집에서도 그 드라마 같은 일이 생길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류회사 사장의 운전기사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출퇴근이 따로 있지 않았다. 학교를 다녀오면 집에서 지루박 춤을 연습하고는 했다. 그저 아무런 소동만 없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집에 돌아오면, 이어폰을 끼고 책상에 앉았다. 팬티바람으로 스텝을 밟는 아버지, 이어폰을 끼고 수학문제를 푸는 나, 기묘한 부자의 풍경이었다. 집에 책상하나를 내가 차지해서 였는지, 누나는 바닥에서 숙제를 했는데,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던 누나는 학교보다, 공부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했다.


엄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방공장에서 일을 했다. 엄마는 집에 오면 밥을 했다. 4식구가 먹을꺼라 늘 양을 많이 해두었다. 늦게라도 반찬을 하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아버지, 나, 누나가 각자 몫을 담아 먹었다. 한 방에서 각자 적응하며 살았다. 성적은 오르기도 내리기도 했지만, 탈출구는 그것밖에 몰랐기에 나는 그저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집 정문이 아닌 뒷문을 열고 학교를 가며, 늘 한껸에 주눅이 들기도 했고, 한편 벗어나야지 하는 다짐을 했다.


용케 대학에 들어갔고, 부끄럽게도 시골 집에서 잔치를 했다.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문중을 쫓아다니며, 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작은 금액의 장학금을 받았다. 아버지는 한동안 여기저기를 불려다니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자존감이 올라갔지만, 그것도 그때 잠깐이었다. 대학교에서는 나는 평범한 그저 여러명중의 한명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옷을 입고다녔던 나는 또래들보다 촌스러웠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색 무취한 무개성의 아이였을 뿐이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몇주 지나자 나와 비슷한 그룹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편했다. 그래서 그렇게 지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회사에 들어갔다. 가끔씩 내게 용돈을 주었다. 3만원, 5만원, 그런 누가 좋아지려는 데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났다. 악착같이 집을 떠나기 위해 누나가 선택한 것은 결혼이었다.


대학생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여러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잘하느냐가 문제였다.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했지만, 내가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공부한 경험만이 있을 뿐, 남을 가르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니까.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알지 못했다. 탈출하겠다는 의지만을 가진채 했던 공부에 어떤 재미도 느끼지 못했던 나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한 두달만에 관두게 되었다. 성적이 더 떨어지는 아이와 같이 부모님과 마주 앉는 민망함은 설명이 어려웠다. 그 때부터 몸으로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시작했다. 주유소에서 일했고 집 근처 역앞의 술집에서 서빙을 했다. 돈은 작았으나, 마음은 평온했다.


술집에서 담배를 사러 나온 거리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팔짱을 끼고 역전거리를 걷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아버지의 지루박 꿈은 이루어졌다구나 싶었다. 아버지가 볼새라 얼굴을 숙이고 슈퍼로 뛰어갔다. 부모의 맞바람을 나는 그저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한 방에 모여살면서도 각자 다른 꿈을 꾸었던 우리들.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 드디더 나왔다던 그 시절의 나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대기업의 임원이라도 될꺼라던 아버지의 호언이 무색하게, 입사와 퇴사를 이어졌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가문과 문중을 빛내지 못한 채, 지금은 벌초비도 밀리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는 그저 행복하다. 그 시절을 용케 보내고 이렇게 가끔씩 식구를 만난다는 것에 행복하니까. 명절 때 아주 가끔 보는 식구들,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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