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에
그냥 여기 앉아 있으면, 3대 기획사가 줄서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해 여름, 회사 앞 슈퍼, 파라솔 밑, 팀장과 나, 두 명은 그렇게 앉아있었다. 주황색 회사 다이어리를 왼손에 엉거주춤 쥐고서는, 오른손으로는 시시각각 녹고있는 아이스크림을 위태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SM, YG, JYP 하루 종일 여기서 앉아서 미팅하면, 하루가 다 갔거든.
팀장은 나한테 아님 허공에 두고 한 이야기였을까, 나는 아이스크림을 슬쩍 입으로 훔쳤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던 그 해 여름, 사무실 빌딩 뒷편은 기차길이었다. 기차길 뒷편 나무 숲속에서 매미의 성난 울음소리가 내 귀를 때리고 때렸다. 여름방학 대청마루에 앉은 나에게 외할아버지는 옛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팀장 앞에 나는 마치 오래전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앉아있었다.
여름방학이 서서히 시작하다 갑자기 끝나던 것처럼, 회사의 전성기도, 그렇게 서서히 시작하다 갑자기 끝나고 있었다.
내년에는 나아질꺼다.
외할아버지는 대청마루에 앉은 나에게 이야기 했다, 황금색 논두렁을 바라보며, 바람에 흔들리고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벼싹들처럼, 외할아버지는 나를 두고 내년에는 나아질거라려 읊조렸다.
내년에는 나아질꺼야. 회사의 원년멤버였던 팀장은 그렇게 내게 이야기했다.
더 버틸거라고.
팀장은 나를 두고 외할아버지처럼 읊조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말처럼, 내년에도 나아지지 않고, 회사는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을.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3대 기획사는 더 이상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막대가 츄파춥스통을 튕겨나가듯, 생각지도 않은 말은 입에서 바로 튕겨져 나왔다. 건방졌을까. 상처받았을까. 팀장은. 바로 후회했지만 팀장은 말이 없었다. 그 날 오전, 팀장과 나는 기획사의 미팅을 마치고 나온 길이었다. 바로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파라솔 밑에 있었던 거다.
기획사에서 아쉬운 미팅을 마치고, 나오다가 투명 유리로 된 임원실 앞을 지날 때 팀장이 갑자기 멈춰섰다.
인사드리고 가야죠.
담당자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팀장은 이미 노크와 함께 이사실에 들어가 있었다. 나와 담당자가 문턱 앞에 서서 놀란 표정을 짓는 사이 이사실에 들어간 팀장은 이미 그녀의 책상앞에 서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당황한 표정을 보았다. 처음만난 사이처럼 누구인지 모르는 듯한 그녀의 당황한 표정. 갑작스런 방문에 예민해하는 표정을 우리는 보았다.
엇박자처럼 팀장은 당황한 그녀를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설명을 하기시작했다. 담당자의 커진 눈이 나를 향했다. 비서가 당황해서 뒤늦게 달려나왔다. 나는 어항속에 죽은 척하는 둥둥 떠다니는 열대어가 되고 싶었다.
아!....팀장과 이사가 짧은 악수를 하고 나왔다.
팀장과 나의 뒤로 덜컥. 자동 문잠김 소리 났다. 빌딩의 문은 닫혔고 우리는 서있었다.
새끼 팀장일때부터 안 사이야. 팀장이 내게 말했다.
그렇게 그 날이 팀장과 함께간 그 기획사의 마지막 미팅이었다.
여름 끝의 태풍. 창밖으로 폭우주의보가 세차게 때리고 있던 날.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신생기획사의 Y였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기획사 이름을 보니 떠올랐다. 고등학생인줄 알았던 신입사원 Y를. 여름에 신인그룹이 나온다던 신생기획사 D, 그래서 우리는 Y를 소녀가장이라고 불렀다.
대리님,저희 애들 CD가 나왔어요.전해드리러 왔어요.
지금 밖에 물이 넘치는데라고 얘기할새도 없이 Y.
다 왔어요. 잠깐이면 되요.
1층에 내려가보니, 기록적이라는 그 날의 폭우를 직원들 몇명 구경하고 있었다.
버스는 다니는 구나. 혹시나 가져간 나의 일회용 우산이 무색한 폭우. 그리고, 나는 하얀 양팔을 신고 삼선 슬리퍼를 끌고 있었다. 언발란스였다.
거리에서 Y가 보였다. 횡단보도에 서있는 Y. 설마 아니겠지 싶었다. 한 손에 우산, 한 손에는 박스를 안고 있었다. 맞구나.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박스도 옷도 젖었을텐데, 불안했다. 불고있는 비바람이 거세지며 가로수가 세차게 흔들렸다,
녹색등이 바뀌자, 멀리서 Y가 보였다, 그리고 바람이 훅-불었다, 가로수가 휘청하듯 Y가 우산을 놓쳤다.
아...안돼. 그리고, 젖은 박스가 터졌다. 도로변의 나무들이 요동을 치듯. 박스에서 쏟아진 CD들이 아스팔트에 튀었다.
젠장, 일났다. 나는 우산을 펴고 횡단보도로 냅다 달렸다. 슬리퍼에 양말 신었는데.
CD를 주워 담고 Y를 데리고 왔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적색으로 바뀌기 전에. 달렸고 돌아왔다.
로비에 돌아오니, 슬리퍼 앞으로 하얀 양말을 신은 내 두발이 튀어나와 있었다.
젠장.
발뒷꿈치의 슬리퍼를 황급히 원위치를 돌렸다. Y는 어디에 있지? 둘러보니 내 뒤에서 CD를 정리하고 있었다. 길가던 누군가 Y옆에 우산을 가져다 주었다.
감사합니다.. 비에 젖은 Y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나는 우산을 들고 비를 털었다.
대리님, 애들이 어제 밤새 싸인했는데....
Y가 가지런히 모은 CD를 나에게 주었다. 젖은 모서리가 패인 CD들에는 빼곡한 싸인이 적혀져있었다.
대리님, 잘.. 꼭.. 잘 좀.. 부탁드려요.
뭐라고 대답해야되지, 생각 못한채. 서 있는데, Y가 얘기했다.
저 갈께요. 감사해요. 젖으셔서..어떻게..
창피해서였을까. 바빠서였을까. Y는 그렇게 빗속으로 손살같이 사라졌다.
멍했던 날. 그 날 젖은 모서리가 패인 CD들은 사무실에 돌려지지 못했다. 여느 CD들과 달리 나는 빈 책상에 CD들을 올려두고 조용히 가져가세요라고 했다.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13호 태풍 링링이 서울을 가로지르던 날, 나는 바람에 젖혀진 우산을 바둥바둥 손으로 잡고 있었다.
버틸 수 있어. 갑자기 팀장과 Y가 떠올랐다.
더 버틸꺼라던 팀장은, 끝까지 원년멤버로 회사에 남았다. 나처럼 반은 그만 두었고, 반은 다른 계열사로 전출을 가는 동안 그는 소수의 몇명과 함께 몇 해를 더 버텼다. 그리고, 최근 회사의 채권압류의 소식이 들려왔다.
Y는 데뷔이자 은퇴 앨범이 되버린 싸인CD처럼, 그렇게 먼지가 덮힌채 사라졌다. 기획사는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멤버들은 군대에 갔다고 했다.
비바람과 속에 걷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