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서 행복하신가요?
부모님을 선택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사는 나라는 내가 선택할 수 있잖아.
1년 만에 회사 앞 까페테리아에서 만난 한차장은 얼굴이 좋아졌다.
한차장은 내게 명함한장을 내밀었다. 목포과학대 치기공과 과대표 한.기.명
서울대 공대를 나온 그였다. 나이가 많은 그가 자연스럽게 과대표가 되었다고 했다. 아내는 제빵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딸을 위해서, 좀더 나은 삶을 위해 그는 내년 캐나다로 간다고 했다.
1년 전 회사는 대표가 바뀌고 신규사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1개 본부 담당팀 2개가 날아갔다. 팀원들에게는 당일 팀장대신 팀장대행을 맡고있는 한차장이 고지했다. 3개월 위로금이 지급된다고 했다. 실업급여는 신청않는 게 조건이었다. 자진 퇴사를 밝힌 것으로 처리한다고 했다. 상시 수시 구조조정시대였다.
대기업은 큰 배와같다. 선로를 바뀌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방향을 바꾸면 무섭게 돌진한다. 거치는 것은 다 부서뜨린다. 3년전 신성장동력으로 선정되어 인큐베이팅하던 사업은 외형을 넓힌다는 이유와 담당임원들의 성과를 위해 성급하게 조직이 늘려갔다.
실속없는 정부기관과 외부업체와의 양해각서(MOU)가 이루어지며, 테스크포스는 1본부 2팀으로 규모가 커졌다. 지주에서 임원이 계열사 전배로 내려왔다. 미국 벨연구소 출신 기상무였다. 기상무는 전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최팀장을 영입했다. 근데 사공이 많아지자, 성장은 느려지기만 했다. 기상무는 미국 연구소 출신답게 사업의 컨셉을 펼쳐갔지만, 한국에서의 사업성은 다들 갸우뚱했다.
설익은 사업, 청사진만을 그린다는 기상무에게는 피터팬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갑자기 대표가 바뀌었다. 신임대표는 자신이 있던 계열사를 사모펀드 매각시킨 경험이 있는 매각전문가였다. 대표가 온 한달 뒤, 기상무는 최팀장을 데리고, 다른 계열사로 전배를 갔다. 정확히 둘이 자리를 떠난 뒤부터, 사업내실화가 회사의 화두가 되었다. 지주사 계열사 사담당부터 경영관리팀, 전략기획팀까지 신사업 턴어라운드 방안을 한차장에게 요청하기 시작했다. 남은 최고 선임이 한기명 차장이었던 것이다. 한차장을 중심으로 팀원들은 자구책을 세웠다. 사업 핵심기능을 빼고, 나머지의 아웃소싱도 넣었다. 기획만을 통해서 고정비용을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
한차장이 자신의 팀을 정상화화 하기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때, 한차장 밑에 있던 2명의 공채사원들이 발령이 났다. 1명은 그룹 TF로, 1명은 신입사원 지도선배 파견이었다. 파견이 끝났지만, 그 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명은 계열사 인사팀으로, 한명은 인재원으로 발령이 났다.
인사팀은 한차장과 남은 인원들에게 그들은 회상의 잉여인력이라고 썼다. 모두들 착한 것인지 아님 순응에 길들여져서 인지,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다.주말 파티션 업체는 부지런히 공사를 했고, 본부가 일하던 그 곳은 월요일, 영업본부의 창고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우리는 그저 그런듯 잊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업본부 창고를 지나갈때 한동안 마음이 안좋았다. 같이 일한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다니.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2달 뒤, 한차장은 고향인 목포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한계절이 지난 뒤, 페이스북으로 그의 입학 소식을 들었다. 대졸 전형으로 전문대 치기공과로 입학했다고 했다. 캠퍼스에서 활짝 웃은 그의 모습이 눈부셨다.
한차장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내게 이야기했다.
서울대 출신이 다시 전문대에 간다니까, 부모님부터 친척까지 다들 뭐라하더라고. 완곡하게 이야기하지만, 실패자였던거지. 나는, 그 분들에게는 서울대 출신이 전문대에 간다는 것은. 변호사, 변리사 뭐 아님 사업가라던가, 그런 성공을 했어야 하는거지.
족쇄 같은거야. 뭐가 대단하다고, 서울대 세계 몇위인지 알아요? 우리가 좋아하는 대학랭킹에서 63위라고요. 근데 나는 아직도 멀었더라고. 치기공응 배우면서도, 계속 내가 이걸 하는게 맞나 이러고,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인가 싶고, 나는 정말 실패자인가, 계속 묻게되고
그래서 떠나려고. 한국에서는 나는 계속 실패자가 되기 싫어서.
한차장 이야기 했다.
캐나다에서는 어디 학교 나왔는지 물어보지 않잖아.
그곳에서는 어느 대학교를 나온게 아닌, 그저 온전한 나인거지.
그저 이민자죠 뭐. 내가 이야기했다.
맞어. 이민자지. 이민자에게 무슨 대학출신인지가 뭐가 중요하겠어. 서울대 출신이라고 해도 알아먹을까 개네들이.
모르죠. 당연히. 나는 그를 쳐다봤다.
부모님은 선택할 수 없지만, 사는 나라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니까. 맞지?
맞아요. 나는 그를 배웅하면서, 그래도 부럽네요라고 했다. 뒤늦게라도 마음의 안식을 찾은 것 같은 그에게.
캐나다 퀘벡에 있는 그는 페이스북에 가끔식 사진을 올린다. 그의 성품처럼 포스팅은 성실하지만, 글은 늘 겸손하다.
단풍국입니다. 강이 너무 커서 딸이 바다라고 하네요. 모처럼 가족이 화창한 날을 즐기고 있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그 곳에서 그는 밝게 웃고 있었다.
한차장님...
나는 좋아요를 누른다. 꾸욱.
그리고 돌아온 월요일.
회사는 주력사업을 사모펀드에 분리, 매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