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과 데칼코마니였던 나의 어린 시절.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개봉 이후, 보고 싶었지만,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날까 봐 망설여졌던 거다.
우리 집은 언덕 위 반지하집에 살았다. 대왕 카스텔라 가게 정도였을까? 시골에서 올라온 아버지는, 야심 찾던 사업의 실패가 왔고,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이 넘어갔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서울 화곡동 언덕 반지하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영화 속 기택과 달리 아버지는 바로 재기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계획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향 친구의 소개로 어느 사장님의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어머니 역시, 이사 간 주인집의 가사도우미가 되었다. 누구나 그랬을 '기생충'과 비슷하면서 다른 설정의 유년기가 지나갔다. 박사장 가족이 캠핑을 간 날처럼, 우리 가족도 가끔은 호사를 누렸다. 어머니는 가정부 일을 하며, 남은 음식을 종종 가지고 와서 식구들을 먹였다. 아버지는 사장님 댁이 휴가를 가면, 차를 끌고 집으로 왔다. 식구들을 테우고 서울시내를 다녔다. 북악 스카이웨이가 여기라며, 아버지가 호기롭게 이야기하던 그때가 기억난다. 예전 사업하던 기분을 잠시 동안이지만, 낸 것이다.
문광이 박사장 집에 찾아오는 것처럼, 일장춘몽은 깨지기 마련이었다. 현실은 언제나 돌아왔고, 사업실패는 경제적인 어려움 외에 모두의 마음에 상처 하나로 오래 남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이 잦았다. 단칸방이라, 어디에도 피할 곳도 없었다. 그럴 때 내 주위를 끈 건 꼽등이다. 야행성으로 부엌 장판에서 올라오는 꼽등이. 박사장이 이야기하는 기택의 냄새, 나는 그 냄새를 설명할 수 없지만, 기억해 낼 수 있다. 오리지널 반지하의 냄새. 어딘가 눅눅해서 썩고 있는 냄새. 영화 촬영 중에 음식물쓰레기를 만들어, 반지하 촬영 시에 배우들이 연기하며, 그 냄새를 느낄 수 있게 했다는 영화 제작 비하인드를 들었다. 연기가 정말 시의적절할 수밖에 없었다. 기택 가족이 비가 몹시 오는 날, 끝이 없는 계단을 내려가던 것처럼, 나는 그 계단을 오르고 내리며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장마철이 되면 우리 집은 물바다가 됐다. 영화에서 변기의 역류처럼, 하수구에서는 황토물이 역류했다. 아버지는 그런 날이면, 욕과 함께 내년에 이사 갈 거라고 중얼거렸다.
기우가 박사장의 집에 처음 가던 날처럼, 나도 짝꿍 집에 처음 초대를 받았던 날이 기억난다. 그 동네에서 가장 큰 집, 정원이 있던 집. 나는 기택처럼 원을 돌면서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 마당에는 보더콜리가 살았다. 집 냄새가 달랐다. 문광과 같은 가사도우미가 과일을 내왔고, 연교와 같은 그 애의 어머니가 나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그날이 마지막 초대였다. 그 날, 내가 선을 넘었을까? 냄새가 났을까?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다른 신경이 쓸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반지하의 삶은 불편하고, 불편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어린 나이부터, 눈치라는 것을 보며, 매일매일 사는 게 중요했다. 화가 나도, 분노해도 달리 방법이 없음을 이미 체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며, 잠시 꿈을 꾸기도 한다. 아버지가 사장님 차를 끌고 와서, 우리를 데려갔던 것처럼, 그렇게 잠깐 동안 반지하를 벗어나서, 북악 스카이웨이로 데려간다. 그래서, 나의 유년시절, 나와 같은 반지하 키드들에게는 이 기생충이란 영화는 불편했다. 그렇지만, 기택처럼 화가 났냐고. 아니다. 지금 화낼 시간이 없는 현실, 주말에도 연락 오는 고객사와 연락을 한다. 월요일에는 지옥철을 타고 출근을 한다. 돌아오는 카드대금에 골치를 싸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 못 이루는 이 밤에 생각한다. 이런 영화가 근래에 있었던가? 내 기억에서 잊혔던, 꼭꼭 숨겨뒀던 그 화곡동 언덕 위 반지하집을 떠올리게 만든, 영화가 있었던가 하고 말이다. 봉준호 감독님에게 감사한다. 영화를 만든 이들과 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