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산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K과장님이 죽었데요."
어느날과 다를 게 없는 어느날, 나는 또 1분을 남겨두고 회사에 출근했다. 수요일 정각 9시, 팀장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그룹 노래가 울려퍼지고, TV는 자동으로 켜진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15분간 우리는 사내뉴스를 본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오직 인사팀 뿐, 그들은 시청자세가 불량하거나, 시청을 하지 않거나, 또는 자리를 이탈해 이동하는 직원을 체크한다.
그 날도 보통의 수요일 아침을 기대했던 그런 날인줄 알았다. 9시 정각, 하지만, 직원들은 TV에 집중하지 못했다. 여직원 중 일부는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팀장들은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수요일 오전, 팀방에 카톡이 울였다. K과장의 부고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서서 살펴본 재무팀의 A과장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하얀국화가 책상에 놓여졌다.
점심시간에 알았다. K과장의 투신을 말이다. 그리고, 그가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는 것을,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잠들기전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하고 뛰어내렸다.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는데, 그의 마지막을 알게 되었다. 하루종일 가라앉은 마음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울증은 매달 정기적으로 회사상담프로그램에 참가하라는 메일에서 봤던게 다였다. '마음의 병도 병이다.'가볍게 참여하세요, 모든 정보는 보호됩니다라는 문구,
하지만, 아무도 선뜻 누를 수 없다고 했다. 상담이 인사기록에 남을까, 상사에 보고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승진과 고가에 반영될 수 밖에 없다며, 모두들 상담프로그램은 받기를 꺼렸다. 상담사도 인사팀 소속의 계약직 지원이니, 수긍이 되었다.
장례식은 하지 않는다고 그날 팀장은 얘기했디. A과장의 가족들이 조용히 장례를 치르겠다며 회사에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나는 K를 매월 한번씩 만났다. 재무팀 담당자와 팀의 경비담당자로 말이다. 팀의 경비가 잘못되면, K는 나를 불렀고, 예산이 부족하면 나는 K를 찾아갔다.
K의 책상 위 국화가 마를때 쯤, 재무팀은 회식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었다. 경비절감 목표를 달성했다는 포상을 받았다고 들었다. 국화는 어느새 사라졌고, 모든 것은 지극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K의 자리는 계열사 전배로 과장 1명이 들어왔다. 하루하루가 지났고, 또 그렇게 월말이 찾아왔다.
"커피 잘마셨습니다. 전표계정이 자주 헷갈릴 수 있어요. 저도 실수를 많이한답니다. by K"
K가 쓴 포스트잇이 2달전 내 전표에 붙어있었다. 샘플로 남겨둔 전표에 K는 흔적이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 날 나는 실수로 그에게 전표수정을 하게 만든 날었고, 미안한 마음에 아메리카노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K는 조용했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K의 기억이 잊어질때쯤, 힘든 시간이 또 찾아왔다. 제일 먼저 아르바이트와 계약직이 짤렸다. 불황은 그렇게 밑에서부터,사람들을 부서버렸다. 무급휴직과 주3일 근무, 그리고, 명예퇴직이 시작되었다. 보직이 없는 고연차 직원들이 1순위 타켓이 되었다. 평소에 눈밖에 나던 직원들이 기한없는 무급휴직과 명예퇴직으로 정리될꺼라는 소문이 돌았다.
"개목줄 하나에 목숨을 건다." 퇴직면담을 한 뒤, 누군가 호탕하게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되었다.
"돌에 붙은 젖은 낙엽잎처럼 달라붙어있어라" 응원의 목소리가 이어 나왔다. 회사의 옥상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인사팀에서 메일이 오면 싱담이 시작된다고 했다. 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인의 심정, 나도 매일 매일 메일함을 열때 그런 기분이었다. 메일은 오지 않았다. 하디만, 자리들이 비워졌다.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자신의 시간을 팔아 돈을 번다. 그 돈을 시급, 월급 또는 연봉이라 부른다.
어디에선가 본 이 문장에 나는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우리는 시간을 팔았다. KPI를 달성하기 위해, 회사의 목표를 위해, 그룹의 원대한 비전을 위해, 매일 TV를 보며 세뇌당했었다. 승진하기 위해, 카드를 막기 위해, 명품을 사기위해 나의 시간을 팔았다. 시간을 영원히 가진 것, K가 하무하게 맞이한 끝처럼, 누구에게나 끝이 있지만, 그걸 잊고 살았다. 정전이 되면 한순간 꺼지는 모니터처럼, 그 끝은 갑자기 다가온다는 사실을 몰랐다.
'너의 시간을 팔아 돈을 벌지마라. 소중한 일을 찾아, 너의 모든 시간을 쏟아라.' 내 안의 목소리가 심장소리처럼 울려퍼졌다. 출근하자마자 메일함에서 상담소 메일을 찾았다. 그리고, 나는 상담예약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