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성훈 Apr 04. 2018

입사 D-7, 멘탈잡기

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0. 제주 한 달 살기 말고 직장 n년 다니기

이번 여행은 조금 길게 떠날 생각이다. 그동안 짧은 여행에서 항상 느꼈던 아쉬움을 해소하고 장기거주자, 생활자로서의 감각을 느껴보려 한다. 다만 이건 비행기 타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회사에서 일을 하는 '여정'이다. 한달살기가 아니라 'n년 다니기'다.


불안해졌다. 막상 오래 다닐 회사라고 생각하니까. 소개팅을 앞둔 게 아니라 결혼식을 하루 앞둔 것처럼 신중해지고 마음이 왔다갔다했다. 내가 잘못 안 건 아닌지, 낯선 곳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생각했던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을지 등등 이런 질문에 스스로 답하며 기대치를 올렸다가 다시 막연한 초초함에 어쩔줄 몰라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이 기대와 초초함의 사이클은 빠르게 회전하며 심장을 뛰게 했다.


만져도 돼. 그거 곰인형이야...


불안과 공포의 원인은 무지에 있다. 불안하면 이리저리 검색해보고, 자료를 뒤져보고, 나름의 시나리오를 짜는 습관이 괜히 생긴 것도 다 알고 싶어서 그런 거다.


불안하면 집중해야 하지만, 불안해서 집중이 안 되던 일주일이었다. 강박적으로 스크롤을 내리고 습관적으로 페이스북을 들락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가 운좋게도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콘텐츠를 발견했다.



1. 최선을 다한 아마추어의 미래

크라우드 펀딩으로 가방을 샀다. 마케터의 직업병인지 아니면 틈만 나면 왜?라고 묻는 나의 성격 탓인지 뭔가를 구매하고 나면 어떤 포인트에서 끌렸는지 생각해본다(앞뒤가 바뀐 것 같다면 기분탓이다). 디자인이나 소개글에서 어떤 부분을 주목했었는지, 구체적인 필요로 산 건지 아니면 충동구매였는지 등등. 그런데 이상했다. 이 가방을 구매한 이유에 합리라고는 없었다.


패션에 관심이 지대한 것도 아니고, 가죽소재나 제조공정 등을 공부할 열의도 없는 상황에서 이것저것 따져가며 검증하는 건 불가능했다. 필터링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니 사지 않았어야 했다. 단순히 발품 팔기 귀찮고 생각하기 귀찮아서 샀다기에 20만원은 큰 돈이다. 이만한 돈은 크라우드 펀딩에도, 가방에도 써 본적이 없다. 사면 안 되는 거였다. 대체 뭘 믿고 산 걸까. 쇼핑몰이 아니라서 환불도 어렵다는 이 녀석을.


다른 사람들은 왜 샀는지 궁금해져서 후기를 읽었다. 그 중 가방을 잘 아는 듯한 사람이 남긴 장문의 편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왜 샀는지도 알게 됐다.


이 가방을 만든 사람은 나와 닮았고, 내가 배우고 싶은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다.


'최선을 다한 아마추어'

정확한 평가다. 리뷰 작성자가 가방을 보고 느낀 감정을 나는 제작자가 작성한 소개글에서 느꼈다. 글이 참 절절했다. 업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윈저노트> 가방을 만들게 된 배경으로 시작해서, 소재와 마감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설명하는 내용 전부 그랬다. 누가봐도 불꽃남자의 글이었다.  


글만 봐도 막 땀나고 뜨겁고.. 막..


글의 구성이나 내용이 어설펐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읽는 사람이 궁금해 할 부분을 충실히 설명하는 좋은 글이었다. 하지만 글자색변경/볼드체/밑줄 등의 현란함과, 장식적인 문체, 단어선택에서 전달되는 현장감 같은 것들에서 제작자의 열정이 느껴졌다. 아직 덜 다듬어진 이 사람의 진심이 보였다.


그래서 믿기로 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200만원짜리 명품가방 못지않게 마감에 신경썼고, 고급 가죽을 썼다는 말을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나의 지갑을 열게 만든 건 믿음이었다
"이런 사람이 만들었다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누가 거짓말을 하면 속기 쉽다. 사진은 얼마든지 보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문체는 좀처럼 복제하거나 가공하기 어렵다. 이 펀딩의 제목은 <백화점담당이 신뢰로 만드는 남자가방>이다. 본래 의도는 <백화점담당>이라는 타이틀로 사람들을 후킹하는 것이었겠지만, 정작 주목해야 할 지점은 <신뢰>다. 평소에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이 제작자가 <신뢰>를 주기 위해 마음을 꽉꽉 눌러담았을 모습이 그려진다.


실제로 받은 가방은 만족스럽게 잘 쓰고 있다. 디자인과 가죽 퀄리티 모두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든다. 하지만 가방의 무게와 기타 사용성 면에서 자잘한 아쉬움이 남는다. 나의 미래도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모든 걸 쏟아부어가며 노력해도 부족한 부분이 생길 것이다. 그 노련하지 못함은 한동안 결핍된 채로 남아있을 게 분명하다.


이 가방을 만든 제작자는 단순히 열정만 가지고 있던 게 아니다. 분명 탄탄한 기본을 갖췄고 그걸 끝까지 밀어붙일 실력이 있었다. 스스로 후회가 남지 않는 건 물론이고 남들에게 그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방법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신뢰 받는 컨텐츠를 만들고 싶다.


p.s.

그동안 텀블벅, 와디즈, 인디고고에 여러번 펀딩을 했지만 사실은 펀딩이라기보다 구매에 가까웠다. 적정가격은 얼마인지 혹은 얼마나 취향에 맞는지를 기준으로 '선주문'을 한 셈인데, 이렇게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느낌은 처음인 것 같다. 이 제작자의 5년 후가 진심으로 기대된다.





<와디즈 '윈저노트' 펀딩 프로젝트 소개글>

https://www.wadiz.kr/web/campaign/detail/17083


<김재성님의 '최선을 다한 아마추어' 리뷰>

https://www.facebook.com/Plusclov/posts/1731903803555365




2. 남들보다 타석에 많이 서기

대단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잦아진다. 자신의 분야에서 의미있는 성과를 이룬 사람부터 업무능력, 사교성 두루 갖춘 사기캐까지. 독서모임 <트레바리> 덕분이다.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과, 나는 뭐지 하는 열등감이 동시에 든다.


각 분야별 전문가와 업계 실력자들을 모이게 한 장본인 <트레바리> 윤수영 대표 역시 정말 스마트한 사람이지만 그의 글은 더없이 겸손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얼마나 평범하고 또 뻔한 사람인지를 알아가고 있다.


두려운 일이다. 이런 사람도 스스로 평범하다고 느낀다니.. 내 지능이 똑똑함에서 평범함으로 하강하는 그래프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 선의 기울기를 따라 쭉 그려보면 남은 건 멍청해지는 일밖에 없다. 그 와중에 멋지고 대단한 사람은 지천에 있다. 이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하나... 


다행히 윤수영 대표는 자신이 부딪혀가며 얻은 깨달을 뒤에 서술한다.

어줍잖게 고민하는 것보다, 남들보다 타석에 훨씬 많이 서는 게 적어도 나한테는 더 현명한 전략이다.


뭘 하든 첫 타석에 홈런을 칠 수는 없을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오히려 더 다양한 시도를 만든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웹툰작가 지망생 중에는 몇 년째 지망생 신분으로 살아가며 벼랑끝에 몰린 사람들이 있다. 이제 그만둘까..  하는 갈림길에 선 사람들. 이들은 보통과는 다른 접근법을 쓴다. 보통 지망생들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자신의 콘티 하나를 보여여준다.


하지만 벼랑끝 지망생들은 4, 5개를 가져가서 1개가 거절당하면 "그럼 이건요?", "아님 저건요?" 하면서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본다.


말하자면 플랜 E까지 준비해오는 셈인데, 평소 노력과 체력의 300% 이상을 썼다는 얘기다. 말도 안되는 작업량이다. 여기에 번뜩이는 아이디어, 기막힌 설정, 완전히 새로운 구성이 끼어들 시간은 없다. 평소에 적어둔 메모나, 어린시절 열광했던 작품, 확신은 없지만 일단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앞으로 굴러가게 만들어야 한다.


일단, 여러번 타석에 서야 한다.

오래 + 자주

출근해야 한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여러 프로젝트에 출근해야 한다.

굳이 초천재가 아니라도 멋진 일을 할 수 있다.

이 말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윤수영 대표 '꾸역꾸역 타석에 서기' 페이스북 글>

https://www.facebook.com/SooYoung1106/posts/1555380281179312



설렘이 끝나도 관계는 계속된다.
나의 긴 여정은 이제서야 시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른하게 키득거리기, 딴짓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