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성훈 Apr 13. 2018

새로운 걸 받아들일 여유는 없는데

그래도 이건 재밌을걸?

0. 피곤함을 뚫어내는 힘

출근 전날 새벽,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추천받은 영화가 떠올랐다. <세번째 살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팬이라는 수식이 부끄럽게도 아직 못 봤다. 극장에 걸리기 전부터 기대했지만, 회사에서 준 프로젝트/개인적인 사이드 프로젝트/이직준비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2월 한달이 2주처럼 지나갔다. 격동의 2월과 3월이 지나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전날 하필 바빠지기 직전에 이 영화가 떠올라버렸다.


더 이상 미루기에는 내 팬심이 허락하지 않아 일주일 기간권을 구매했다. "일주일이면 뭐, 2번도 보겠네" 하는 느낌으로. 그땐 몰랐다. 새 직장에 들어가고 첫 일주일이 얼마나 피곤한지. 그래도 2시간짜리 영화 한 편 볼 여유 정도는 충분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출근 전날부터 초조함에 밤을 새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일주일 내내 저녁 10시만 되면 침대에 몸을 던지면서 잠들거라는 상상은 전혀 못한채로 피곤한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칼퇴를 했지만 영화를 볼 기력이 없었다. 지난 일주일간 온몸으로 얻은 깨달음이다.


피곤하면 새로운 걸 받아들일 여유가 사라진다


일단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다. 불면증을 유발한다는 휴대폰 블루라이트도 눈이 감기는 걸 막을 수 없다. 책을 읽었는데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망막에서 뇌로 가는 모든 길이 막힌 상태다. 낮에는 쌩쌩했지만 저녁만 되면 스위치 꺼진 로봇처럼 기운이 쪽 빠졌다. 이럴 때 흡수되는 컨텐츠는 둘 중 하나다.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것,
혹은 자극적인 것.


팬심도 이기지 못한 피곤함을 뚫어버린 컨텐츠를 소개한다. 뭐가 그렇게 재밌었길래.



1. 저도 마케팅을 하는데요_마케터의 일

스타트업 마케터 중에 배민의 행보를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전국민이 알고 있는 치믈리에 자격시험부터 설정만으로 웃음이 터졌던 혜자+창렬 더블캐스팅 뮤비, 고든램지 서재에 끼워넣겠다는 정기간행물 매거진F 까지 뭘해도 배민스럽고 즐거워보인다. 심지어 마케터 한명 한명이 업계의 인플루언서다.


그럼에도 내가 배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양면적이었다. 훌륭한 레퍼런지만 너무 모범사례같아서 내가 응용할 수는 없는 느낌. 가져다 쓰려고 하면 유격이 느껴진다. 스타트업 용어로, 핏이 안맞는.


<배민다움>이나, <책 잘 읽는 방법>을 굳이 사서 보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마케터의 일>은 너무 정확히 마케터로서의 나를 겨냥하고 있었고, 심하게 많은 사람들이 #탁월하다는 간증글을 올리는 바람에 반신반의하며 구매했다. 마케팅 책은 90%가 사짜/이론가/난 되던데  왜않되? 3가지 중 하나라는 짧은 경험칙을 버리지 못한 채로. 속으로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마케팅 효율을 높여야 되는데, 지금 당장 적용할 수 있을까?


 업게마다 마케터의 역할이 천차만별인데 나에게도 해당사항이 있을까?


나의 습관을 바꿀, 새로운 접근법을 배울 수 있을까?


하나라도 얻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에게 저자는 번번이 YES를 외치며, 3일간의 출퇴근 시간을 순삭시켰다. 9호선의 그 좁고, 냄새나고, 시끄러운 공간에서 내릴 때까지 한번도 몰입이 깨지지 않았다. 새로운 내용을 배워서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게 이 책의 미덕이다. 뻔한 가족애를 테마로 한 영화가 천만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처럼.



실제로 <마케터의 일>은 스토리텔링 측면에서도 배울점이 많다.


마케터로 일하다 보면 왜 하는지 모르는 일을 요청받을 떄가 가끔 있습니다. '이벤트 만들어주세요', '배너 만들어주세요' 같은 것.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지 늘 어렵습니다.


이렇게 매번 사례를 들고, 필요하면 비유를 들어서 공감대를 형성한 다음 시작한다.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다. 이러면 몰입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상대가 좋은 대답을 줄 거라는 기대를 가진 경우에는 더더욱.


일 잘하는 사람들은 '왜'를 먼저 확인합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지 분명히 합니다. '왜'와 '목표'는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수단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원합니다.


아, 이거다. 진짜 궁금했던 건 효율적인 방법론이나 본질을 뚫는 통찰 같은 게 아니었다. '내가 정말 마케터라는 포지션에 적합한 사람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나는 무언가를 잘 파는 사람일까."라는 풀리지 않은 질문에 저자는 나같은 인간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매사에 '왜'를 달고 사는 사람이 일을 잘한다며.


일을 잘하고 싶어 펼쳐든 책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다.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 호기심과 질문을 잘 간직해야 한다.


3년이 지나 다시보면 지금과는 다른 부분에서 위로받을 게 분명한 책이다. 보통 회사에 꽂아두는 책은 장식일 뿐이지만, <마케터의 일>은 뭔가 잘 안풀리고 답답할 때 꺼내보게 될 거라는 강한 믿음이 생겼다. 고이 간직하는 대신 페이지 사이에 과자가루가 끼고, 커피자국도 남고. 이래저래 접힌 흔적이 남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 책에도, 이 회사의 서비스 구석구석에도 나의 손때를 남겨보고 싶다.


직접 부딪히고 깨져가며 일궈낸 성과를 맛보고 싶다.




2. 미스터리를 풀면 상대의 마음이 보인다_하트시그널2

한번 보면 헤어나올 수 없는 프로그램이 있다. 하트시그널 시즌1은 내가 3년만에 본방사수라는 걸 하게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짝짓기류의 프로그램을 전혀 좋아하지 않음에도 하트시그널을 유독 챙겨본 건 뭔가 강하게 당기는 부분이 있었다는 얘기다. 쪼오옥 빨려들어갈만큼. 그건 뭐였을까.


설정 자체는 비현실적이다.매번 좋아하는 사람이 바뀐다는 컨셉도 그렇지만, 더 의문스러운 부분은 따로 있다. 겨우 3:3 미팅인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각자 1명씩 있을 수 있나?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지 않나?



출연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부풀리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조금만 아파도 온신경을 아픔 그 자체에 쏟는 건강염려증 환차처럼. 혹은 모든 사람을 환자로 보는 의사처럼. 쉐어하우스 입주자들은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를 연애감정의 시그널로 해석해야 하는 상황이다(대본이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건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더 자세히, 더 집중해서 보게 된다. 미세한 시선처리나, 손가락 움직임 하나에도 저 사람의 진심이 담겨있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여기서 의문이 풀린다. 이건 추리게임이다.


시청자들은 미세한 단서를 가지고 추리하는 탐정이 된다


다만 하트시그널에는 범죄자가 아니라 연애감정이 있고, 확실한 범인이 아니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미스터리가 있다. 수수께끼는 답을 알고나면 흥미가 떨어지지만, 미스터리에는 정답이 없다. 불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야 한다.


그리고 이 미스터리의 끝에는
"상대의 마음을 확인한다"는 매력적인 보상이 있다


내가 부러웠던 건 시그널하우스 안에서 벌어지는 풋풋한 연애감정이기도 하지만, 더 강렬하게 갖고싶었던 건 김이나 윤종신의 섬세한 관찰력과 양재웅의 정확한 해석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예민하게 눈치채고 싶었다.


마치 스토리를 매개로 타인을 이해하듯, 게임을 플레이하며 생존기술을 익히듯, 미스터리를 풀어가다 보면 패턴을 머리속에 입력할 수 있게 된다. 바둑기사의 머리속에 수많은 기보가 저장되어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상대의 마음을 조금 더 잘 읽게 될지도 모른다. 꾸준히 연습하고 관심을 기울이면 말이다.



3. 엄청 필요했구나

에너지를 완전히 써버려서 뇌가 활동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아주 꾸준히 활동하는 중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나의 뇌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을 민감하게 알아채고 열성적으로 반응하도록 짜여져있구나 싶다. 자아가 유난히 강한 나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예민하다.


처음에 했던 말을 조금 수정해야겠다. 피곤하다고 해서 새로운 걸 받아들일 여유가 아예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모두 나에게 와닿는 것도 아니다.


필요가 피곤함을 이긴다


이때의 필요는 극단적인 실용성과는 다르다. 본능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동기는 재미다. 알고보면 이 재미란 녀석도 결국 필요와 맞닿아있다. 재미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

매거진의 이전글 입사 D-7, 멘탈잡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