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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Apr 24. 2018

혼자서 끙끙 앓다가 지치는 건 싫어서

드디어 잡는 최초의 악수

0. 나가기 싫은데


"전형적인 집돌이에요. 취미도 모조리 실내에서 하는 것들이구요."


라고 말하면 다들 의외라는 반응이다. 독서모임에 꾸준히 참석하고, 갑자기 개인 프로젝트라며 사람들을 인터뷰 하고, 지난주에는 브라우니 만들기 원데이클래스까지 다녀와놓고서, 한다는 말이 집돌이라니. 주말마다 뽈뽈 돌아다니는 사람은 집돌이 자격박탈이지! 하는 눈빛.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내가 집돌이라는데 뭐. 물론 이곳저곳 열심히 돌아다니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에너지를 소진하고 들어온다.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보조배터리 충천이지만, 정작 충천하고 싶은 건 나 자신이다. 사람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소비하는 내향형 인간의 숙명이다.



집돌이가 밖으로 나도는 이유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갈까, 하는 상상을 1년에 두번씩 한다. 스무살 무렵엔 내가 태어난 순간으로 돌아가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눈에 담아오고 싶었고, 또 어떤 때는 공부를 놔버렸던 고3 시절을 후회했다가, 대학졸업을 앞두고는 독립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꾸려가는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으로 시작한 공상은 나의 결핍을 확인하고 뭉뚱그려져 있던 감정을 들여다보는 꽤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이 타임머신 상상에 언젠가부터 매번 같은 답을 하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가 인생역전을 하거나, 찬란하고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하고싶은 일이 생겨서다. 아니, 강력하게 후회스러운 시절이 떠올라서다.


사춘기 시절, 고민이 생기면 혼자 고민하고 끙끙 앓는 성향이 너무 많은 걸 결정해버렸다. 어른들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과 같은 교실의 아이들을 모두 바보취급 하는 오만으로 머리가 꽉 차서 바깥의 누군가와 고민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힘겨운 시간을 건강하게 이겨낼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 때 누구라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했다면. 내 인생이 통째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까지 거창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덜 힘든 사춘기를 보낼 순 있었겠지. 무엇보다 아쉬운 건, 앞으로 찾아올 크고작은 힘든 순간에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한 채 사춘기를 지나친 일이다.


후회


집돌이마저 기를 쓰고 밖으로 나다니게 만드는 감각이다.


또다시 복잡한 시기를 보내는 내가, 그때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놔두지는 않을 거다. 인간은 경험으로 배운다. 경험은 단순한 사례1이 아닌 증거가 된다. 아, 이렇게하면 슬픈 감정이 누그러지는구나. 하는 증거를 발견하고 나면 다음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한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아주 힘들었던 순간들을 모두 찾아가서 가만히 울고있는 어린시절의 나를 안아주고 싶다.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이제부터라도 손을 뻗기로 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감정을 나눌 사람을 만나려고. 소중한 경험을 하고 증거를 수집할 기회를 이번에도 놓치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도 열심히. 말그대로 열심히 밖으로 나갔다.



1. 악수_트레바리 대충문화읽기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은 서점을 돌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주 마주친 책이다. 자주 만나는 책들은 뭔가 있겠지 싶은 생각에 의식적으로라도 이모저모 살피게 되지만, 이 책은 적당히 훑고 덮어버렸다. 물론 유달리 까만 표지와 저자의 표정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남다르긴 했지만, 무엇보다 제목이 주는 중압감이 컸기 때문이다. 내 감정도 추스르지 못해 너덜거리는데,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쏟아질 감정을 감당할 수 있을리가 없다. 타인의 고통이라니.



그렇게 몇 번을 외면했던 책이지만, 결국 찬찬히 책장을 넘겨보게 만든 건 독서모임이었다. 비록 타의에 의한 마주침이지만, 계속 도망치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도망쳤다는 죄책감이 덜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대학교재처럼 두껍게 느껴졌던 책은 막상 받아보니 겨우 200쪽 남짓이었고, 전문적인 내용을 굳이 두번세번 꼬아서 설명해놓은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역시 기우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던지는 질문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이해하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아서 입장을 내놓아야 하는 책이었고, 그 대답이 나의 삶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지를 묻는 책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소비하고, 타자화하는 일이 비윤리적이라는 걸 알면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나의) 패턴을 깨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배워서 알고있는 것 말고, 뉴스를 마주했을 때 나의 반응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뉴스에 등장한 타인은 살면서 절대 마주칠 일 없는 그룹에 속할 때도 많지만, 특정 순간에는 민감하고 격하게 반응한다. 생각해보면 그 밑바탕에는 위기감이 깔려있다. 나 역시 언제든 저 사람처럼 될 수 있다는 위기감. A그룹은 차별해도 아무런 반작용이 없다는 식의 경험은 학습된다. A는 선례가 되어 B, C, D로 확장된다. 학력, 재력, 거주지 등등 우리 사회의 무수한 필터들은 언제든지 나를 소수자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다.


이런 요지로 독후감을 남겼는데, 나를 돌아본 것까지는 좋았지만 부당하게 차별받는 사람에만 관심을 쏟고 사회 전반에 더 예민하지 못한 스스로를 바꿀 방법은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 급하게 완성시킨 머리속 결론을 가지고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그건 곧바로 들킨다.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여러 사람 앞에서 더듬거리며 말하고 나면 창피함이 밀려온다. 이런 종류의 고통은 유난히 오래 곱씹게 되고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여기에 비하면 이불밖으로 나와 샤워하고 갈아입을 옷 고르는 준비과정은 상쾌한 수준이다.



하지만 밀려오는 창피함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던 건, 어떻게든 타인을 이해해보려고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순간이 귀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해와 공감, 존중과 방관, 타인과 나를 구분하며 어느것도 간편하게 결론지으려 하지 않는 모임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나. 모르겠다.


책 한 권으로, 모임 몇 번으로 뒤바뀔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의 만남이 꽤 설득력 있는 경험증거라는 확신은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했고, 다행히 악수라는 화답을 받았다.




2. 유난히 예민했던 아이가 건네는 위로_디어클라우드 콘서트 my dear, my lover 


콘서트를 보러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4집 정규앨범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차분한 느낌으로 진행되겠거니 했다. 스탠딩 없이 지정좌석으로만 진행되는 것도 이번 공연의 온도를 짐작하게 했다. 낮게 깔린 위로를 2시간 동안 만끽하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다. 정작 공연이 끝나고, 어땠냐는 지인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좋았어♡
신나고, 슬프고, 춤추고 왔어


여러감정을 다 느꼈다. 전주가 흐를 때마다 오늘의 베스트가 바뀌고, 감정선이 미묘하게 바뀌는 걸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온전히 즐기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도 했는데 역시 공연에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확신만 남았다.


더불어 생필품은 굿즈로 마련하는 거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이런 감정변화를 만드는 게 노래의 힘이긴 하지만, 감정이 생겨나고 퍼지도록 충분한 시간을 만들어 준 건 보컬 나인의 멘트였다. 앨범을 낸 다음 전혀 홍보활동을 하지 않다가 처음 관객과 만나는 자리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곡 하나하나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들어도 괜찮을까 싶을 만큼.


어린 시절에 겪은 어려움부터 아주 최근에 일어난 힘듦까지. 덕분에 나인의 어린시절을 상상하며, 나의 힘들었던 사춘기를 떠올리며 한껏 이입했다. 구체적인 사연까지 공유할 수는 없지만 노래의 제목과 짧은 가사를 연달아 보면 곡을 쓴 사람의 마음이 전해진다.


21세기 히어로는 어디에

돈도 실력이다 아찔한 그 한마디에
떳떳한 꿈이 바랜 하루가 가네


미안해

다시 눈을 감아버렸어
어지럽던 그 얕은 마음은
차마 너를 안아주지 못했어


네 곁에 있어

부디 이 세상에 혼자이려 하지마
나를 밀어내지마 난 네 곁에 있어


네가 아파하지 않길, 단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곡이라는 말이 참 와닿았다.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혼자 조용히 삼각김밥을 꺼내먹던 아이. 그 아이는 커서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을 위로한다.


그는 "미안해"라고 말하는 어른이다
"괜찮니" 먼저와서 물어보는 어른이다
"함께 춤 추자"며 손을 건네는 사람이다.


아픔을 절절하게 느끼며 성장했던 사람이 건네는 위로는 주파수를 정확하게 맞춘 라디오같다. 지지직 거리는 소리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만이 들려줄 수 있는 아주 깔끔한 소리가 난다.


p.s.

그는 공연 전날 악몽을 꿨다고 했다. 한명이 아니라 멤버 전체가 다양한 종류의 악몽을 꾼다고. 객석이 비어있거나 전혀 모르는 곡을 연주해야 하는 식으로, 각자의 스트레스와 불안이 꿈에 나타난다고. 의외였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즐기는 모습이 부럽게만 보였는데 그 뒤에 얼마나 많은 연습과 두려움이 있었을지 짐작도 하기 어렵다. 두고두고 고마워할 일이다.




3. 자화상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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