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타야보다 따듯하고 교보문고보다 귀여운 공간에 다녀왔다
아무리 작은 독립서점이라지만, 이름부터 '무명'서점이라니. 너무 소박한 거 아닌가 싶었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 임대료도 낼 수 있는지가 제일 궁금한 나로서는, "상업공간으로서의 자각이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둘러보니, 무명이라는 타이틀은 다른 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곳만의 큐레이션과 연대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지만, 아주 작고 단단한 무언가를 쥐고 걸어나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왔다.
2017년 12월,
바람이 유난히 많이 불었던 제주에서
-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길래 서점을 오픈한 걸까.
이전에도 자영업을 해본 적이 있나요?
개인사업은 처음이지만 서점도 일종의 서비스업이잖아요. 카페나 샌드위치 가게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 투잡을 많이 해서 대면 서비스업에는 익숙해요.
직장을 다닐 때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고용안정이 되지 않는 자리나, 시작 단계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다 보니 계속 직장을 옮겨 다녔어요. 또래 중에 그런 친구들도 많았구요. 제 성향상 다양한 걸 시도해보고 싶고, 호기심이 많아서. 한 직장을 오래 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다양한 걸 시도한다면 취미는 어떤 게 있으신가요?
사실 책 읽기예요. 소리 내서 책 읽기. 그리고 동시에 여러 권 읽기. 한 권을 쭉 읽으면 그 작가의 성향이 드러나잖아요. 나는 그런 성향이 싫긴 한데 이 내용은 궁금하고. 그래서 비슷한 내용을 다른 스타일로 쓴 책을 찾아본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호기심이 가는 내용을 다룬 책들을 동시에 읽어요. 그렇게 읽기 시작하니까 재밌더라구요. 지루하면 닫고 다른 걸 읽고.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호기심이 많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어하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놓치기 싫은 그런 유형의 사람. 누군들 안 그렇겠냐만, 나는 줄곧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선택을 거부하려고 애써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심지어 돈도 벌겠다는 생각을 놓지 않는 것도 이런 성향 탓이다. 순간,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더 귀기울여 들어야겠다는 방향성이 생겼다. 같은 판단기준을 가진 사람이 먼저 걸어간 길은 내 미래와 겹쳐질 가능성이 더 높을테니까.
- 그냥 좋아하는 것과, 이걸 해보겠다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다. 가슴에서 발까지 움직이게 만든 기폭제는 뭐였을까, 그게 알고 싶었다.
서점위치를 왜 이곳으로 정하셨는지 궁금해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도 아니고, 주변에 카페도 잘 없는 동네를 굳이 고른 이유가 있을까요?
전 사실 책방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물론 책을 좋아하고 책방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없었고 내가 책방을 하게 되면 이렇게 하고 싶다는 스케치 정도만 있었죠.
고산에 처음 이사왔을 때, '번개전자'라는 낡은 전파사가 있었어요. 폐업된 상태로 낡은 전자가 뒤엉켜있는 곳인데, 그 건물이 되게 조그만해요. 무명서점의 1/3 정도? 저 정도 규모면 나도 책방을 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 없이 "이렇게 만들어야겠다"라는 상상이 펼쳐졌고, 그 장소가 너무 완벽해보였고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이름도 지었어요. 번개전자 간판을 그대로 두고 글자를 좀 지워서 <번개서사>로.
아쉽지만 그 공간을 임대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몇 번 더 시도를 해보다가 포기했죠.
서점 자체를요?
네. 이 공간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그런... 지금처럼 하고싶은 마음이 안 생길 것 같아서.
그러면 지금의 공간을 소개받았을 때에는 괜찮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공간 자체는 마음에 들었는데 비용적으로 고민이 됐죠. 사실 제주도 임대료는 너무 비싸졌거든요.
그쵸. 서울 못지 않죠.
고산이 그나마 저렴한 편이예요. 뚜렷한 관광지가 있는 것도, 도심 지역도 아니니까요. 임대료와 주거비용 다 부담이잖아요. 우연한 기회에 소개를 받았고, 그런 한 번 시도를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해보기로 결정했어요.
1. 기폭제
시작은 서점에 맞는 장소를 찾아다니면서였다. "이제부터 시작!!"하면서 발품을 파는 게 아니라, 일상을 보내면서 어느날 문득 마음에 맞는 장소를 찾아낸 것. 길가다 조그만 가게를 본다고 해서 모두가 서점을 오픈하겠다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하고싶다"는 생각은 그렇게 버튼이 눌려지기를 계속 기다렸던 거다.
2. 임대료 이슈
외곽지역에서 작게 시작했다. 임대료는 필연적으로 입지선정과 연관되는 건가. 유동인구가 많은 중심가에 자리잡으려면 임대료를 많이 내야 하는 상관관계를 벗어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겠지. 이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각자 기준이 다른 것 같다. 이 동네가 좋아서, 일단 임대료가 싸니까, 멀리 떨어져 있을테니 올 사람만 와라. 내 기준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있는 곳이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선정 보다는 품을 들여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게 방법이겠지.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이 공간이 좀 다르게 보이네요. 이 장소를 결정한 다음, 인테리어와 가구를 만들어나간 과정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인테리어는 사실 그대로 두려고 했는데, 페인트만이라도 칠해보자 싶어서 흰색으로 칠했구요.
시설은 1층에 있는 유명제과 사장님이 전등을 달아주셔서, 그걸 따라했는데 일주일이 걸렸어요. 친구 말로는 울면서 달았다고 ㅎㅎ 사실 전등은 약과였어요. 가구들은 다 기증 받거나, 줍줍해서 모은 것들이에요.
음.. 머릿속에 잘 안 그려져요. 누가 폐업한다고 해서 "이거 다 주워가라!!!" 광고하는 것도 아닌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줍줍 하셨던 건가요?
겁이 없었던 거죠. 사실 너무 무대뽀였던 거 같은데, 트위터와 인스타에 글을 올렸어요. 책방을 시작하려는데 새가구를 구매할 필요는 못 느끼고,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가구들로 책방을 채울거다, 주변에 버리는 가구 있으면 저한테 버려주세요! 라구요.
또 전입신고할 때 면사무소에서 폐기하는 게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 말씀드렸더니, 면사무소의 담당자분이 "작년에 폐기를 했다. 아이들이 안 보는 책과 책장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첫 기증자였죠. 기쁜 마음으로 밥집에 가서 딱 한 술 뜨려고 하는데 트위터로 연락이 온 거예요. 이런 책장이 있는데 필요하시냐고. "제가 이사가는 날이랑 책장 오픈 날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와서 가져가요." 하셔서 받은 것들이 <자연> 서가가 된 부엌 장식장, 그 옆의 체크무늬 소파, 그 옆의 정사각형 테이블, 하얀 책장까지 모두요. 마침 그분이 집을 줄이는 타이밍에 저와 인연이 닿은 거죠. 처음엔 1, 2개를 기증받을 계획이었는데 "이건 어때요? 저건요?"라고 하시는데 저는 "아.. 선생님ㅠㅜ (감동)" 결국엔 트럭 2대에 가구를 실어서 왔어요. 저는 그분을 무명서점 가구천사라고 불러요.
그리고 이런 특이한 가구(커버 이미지 참조)는 제주 서부보건소에서 얻었어요. 그때는 사업자등록증 발급에 필요한 보건증을 받으러 간 거였는데, 한쪽에 의자들이 놓여있고 "폐기"라고 붙어있는 거예요.
보물처럼 보였겠네요.
네네. 완전 눈에 꽂혔죠. 알고보니 이사를 가게 되어 버리는 물건이라고 하더라구요. 행정실에 찾아갔더니 안 된다고 하셨어요. 시설물이기 때문에 개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고. 그래서 2주 뒤에 다시 찾아갔어요. 아니 어차피 버릴 건데,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 필요한 공간에 사용하겠다고 설득했죠. 사업계획서까지 급조해서요. 그랬더니 담당 과장님이 흔쾌히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전혀 예상 못했던 해결책이다. 가구는 내가 욕심을 내는 만큼 끝도없이 비싸질 수도 있는 지출항목인데, 기증을 받았다니. 초기비용 문제를 이렇게도 해결할 수 있나? 정말?? 우선 저지르고 보는 방식부터 기증받는 과정까지. 이것저것 따져보고 계산한 다음에서야 겨우 한 걸음 떼는 나에게도 이런 용기나 추진력같은 게 있었나.
- 당신이 좋아하는 건 돈이 되던가요. 이걸로 임대료를 내고 인건비도 벌 수 있나요. 그래야 오래오래 할텐데. 이 인터뷰의 가장 큰 목적은 이걸 알아내는 거다.
지금도 저에게 차를 내주셨는데, 커피를 취급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방문객 체류시간을 늘리고, 수익률도 올릴 수 있는 방법이잖아요.
그쵸. 저도 음료, 주류판매 사업허가를 받기는 했어요. 책만을 취급해서는 운영이 어렵다는 걸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커피머신을 들여서 본격적으로 서비스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에요. 제대로 된 테이블과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데, 전 이제 시작하는 단계니까 우선 책 판매에 집중하려고 해요.
사실 책방을 운영하면서 큰돈을 벌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은 거 같아요. 그래도 사람마다 "이 정도는 벌어야지"라고 할 때 그 기준이 있잖아요. 거기에 따라 공간구성(상품의 구색)도 달라지구요. 사장님의 기준이 궁금합니다.
목표가 있어요. 연세(*제주에서는 월세 대신 1년 단위로 연세를 지불한다)를 낼 만큼 버는 것.
그럼 인건비는요?
그걸 여기서 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상태에서는 그러기 힘들거라고 생각해요. 제 생활비는 투잡으로 버는 거죠.
사람들이 서점에서 책을 살까. 혹은 사게 만들 수 있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했던 생각을 제안처럼 이야기했다. 무명서점에서 책을 보고 알라딘에서 책을 사면 수수료를 받는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타지에서 방문한 손님이라거나, 책을 여러 권 사고 싶지만 부피와 무게 때문에 망설인다든가, 결정적으로 가격 차이 때문에 온라인에서 구매하는 고객에게서도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 필요할테니까요. 허무맹랑하지만 가능해졌으면 좋겠어요. ((무책임한 발상이다ㅇㅅㅇ))
임대료 외에 다른 경제적 어려움도 궁금한데요, 서점 운영하면서 힘든 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하.. 책 입고하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줄 몰랐어요. 가격을 안 알려주는 곳들이 있거든요. "너는 이 책을 살 수는 있지만 얼마인지는 알려줄 수 없어."라는 식이죠. 책을 총 10권 구매하려고 하면, "다 더해서 7만 원이야" 이렇게만 알려주거든요. 책 A가 얼마인지, B는 얼마인지는 모르는 거죠.
그러면 의사결정을 못하는데요..
그러니까요. 가격에 따라 구매 계획이 달라질 수 있는데 그걸 못하게 되니까. 그래서 따졌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그러면 다른 곳에서 사라"였어요.
이렇게까지 전형적일 줄이야...
또 다른 문제는 이런 거예요. 1만원을 주고 책을 사려고 하면 "그건 안 된다. 100만원을 넣어놓고 거기서 공제해야 한다."고 해요. 자신들의 자금확보와 현금흐름을 위해서 이런 계약방식을 유지하는 거죠. 작은책방에만 당연한 것처럼 요구되는 부분이에요. 더 화나는 건 이게 가격뿐만 아니라 의사소통 과정에서도 느껴지는 거에요.
태도에서 드러나는 거군요.
그쵸. 저는 이런 방식의 판매와 구매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어요.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보다가 혼자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시작하게 된 게 '동네책방연합'이라는 모임이에요. 제주의 10여개 서점이 모여 앞서 말한 문제들을 해결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는데, 저도 참여하기 시작했죠.
'동네책방연합'으로 이런 이슈들이 좀 완화되었나요?
아!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죠. 예를 들어 출판사 직거래를 뚫는다고 하면, 출판사에서 하는 말은 보통 총판(도매상)에서 구매해라고 하거든요. 서점을 다 상대하려면 일이 늘어나니까. 하지만 독립서점에서 구비하려고 하는 책들은 총판에 없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요구를 제가 혼자 할 때는 무시당했지만, 3개 서점이 모여서 구매량이 늘어나면 "아 그래? 그럼 보내줄게"가 되는 거죠. 현실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걸 경험했어요.
결국, 연대다.
자본이 부족하면, 여러 명이 힘을 합쳐서라도 모아야 한다.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 상대와 거래할 때, 연대는 가장 강력하면서 동시에 지속가능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 분명 불안할 거다. 안정적인 월급도 없고, 이걸 언제까지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아무도 확신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멘탈을 부여잡는 비결같은 게, 제발 있었으면 했다.
저는 직장을 다니면서 제일 힘든 게 아침에 일어나는 거거든요. 혹시 서점을 하는 입장에서는 일어나는 게 좀 수월한가요? 아니면 출근해서 차를 마시고 음악을 켜놓는 낭만이 있다든가.
저는 지금 투잡을 하고 있어요. 새벽 6시부터 일해요. 재택근무로 일하는 중인데, 원래는 책방을 시작하면서 그만두려고 했지만 이쪽 일도 인원이 부족해서 아직까지는 병행 중이에요. 주말에는 차를 마시면서 책방을 둘러보면 신기하면서 좀 놀라워요. 내가 왜 여기있지 이런 생각이 들고.. 꿈만 같죠.
서점 운영하기 전과 후의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이전에도 투잡이나 비정기적인 프로젝트도 많이 했지만 제 성향은 내성적이에요. 은둔형이죠. 도서관과 목욕탕만 있으면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신박한 조합이네요. 도서관과 목욕탕이라니.
제주에 내려와서 식당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간이 있었어요. 일이 끝나면 옛날 도서관에 가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온갖 종류의 책을 꺼내봤죠. 그러고는 걸어서 5분 거리의 목욕탕에 다녀오면 너무 행복했어요. 굳이 이 이상의 즐거움을 찾지 않는 타입인거죠.
시골의 조그만 책방이지만, 서점 일이라는 게 찾아오는 분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하고 이야기를 끌어내야 하는 대면 서비스업이에요. 이곳까지 찾아와주는 분들이 너어어어무 고맙기도 하구요. 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과의 거리가 급격하게 친밀해졌어요. 두려움이 있죠. 저는 원래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안정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으신가요.
그건 20대에 깨졌어요. 직장을 자주 옮겨다니면서 깨달은 게, 사회에서 나에게 지속적인 안정감을 줄 수 없다는 거였거요.
역시 비결같은 건, 없었다.
- 작은 가게는 자신만의 필살기가 있어야 한다.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독자적인 무언가. 소위 잘나가는 서점들처럼 무명서점도 으레 주인의 주관이 듬뿍 들어간 큐레이션이 중요하겠거니 생각했다. 시/사랑/정치/자연을 내걸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서점의 진열방식은 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았다.
평대에 진열해놓은 책들은 전부 다른 사람들이 추천한 책이더라구요. 사람들이 제일 많이 보는 곳, 교보문고로 따지면 제일 임대료가 비싼 곳에 왜 직접 고른 책은 하나도 놓지 않으신 건가요?
성공한 책방을 보면 주인의 큐레이션, 특성이 많이 묻어나고 그 컨셉에 따라 경쟁력이 좌우되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시/사랑/정치/자연에 대한 큐레이션에 사활을 걸어야겠다.
이 서점만의 필살기?
네. 그런데 그 생각이 변하게 된 게 가구를 구하면서였어요. 저기 보이는 책장 2개도 정말 오픈 직전에 기증받은 거거든요. 어렵게 어렵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가구를 구했는데, 이 사람들이 왜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선뜻 물건을 줬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건 전혀 모르는 사람인 나에게 준 것이 아니라 책방의 가치를 지지한 거다. 책방이 생길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공간에 책방이 오픈한다는 사실에 대한 응원과 격려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들어간 공간인데 그걸 저 혼자 전유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무명서점_가구이야기 라는 카드도 만들게 된 거고,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받는 협동 큐레이션 역시 처음에는 오픈 이벤트로 생각했지만 줍줍을 겪으면서 메인으로 바뀐 거죠. 저는 보충하는 역할로 충분하겠다 싶었어요.
이건 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해요. 인스타 계정을 처음 시작할 때도 썼는데,
아! 봤어요 :D
넨 ㅎㅎ "서점원이 되고 싶었지만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서 책방을 오픈했습니다. 사장님을 찾습니다."
생각해보니 #무규칙_협동_큐레이션 을 통해서 제가 완벽한 서점원이 되는 거죠.
다시, 연대다. 동네책방연합이 작은 것을 모아 크게 만드는 방식의 연대라면, #무규칙_협동_큐레이션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지성 혹은 취향의 모음집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1명의 통치가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가 모이고 부딪히는 민주주의다. 이제 알겠다. 왜 무명서점인지. 연대의 힘으로 지어지고 운영되는 공간에는 유명인사가 중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역시 이건 물어봐야겠다) 큐레이션 방식으로 시/사랑/정치/자연을 꼽은 이유가 궁금한데요, 사실 이 4개는 다른 층위에 있는 개념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이 4가지를 왜 골랐냐를 이야기하면 대답이 될텐데, <사랑예찬>이라는 책을 보면 알랭 바디우가 철학자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 글이 있어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으려면) 철학자는 "시 애호가이자, 뜨거운 연인이자, 열혈 투사이면서, 가장 전문적인 과학자"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현실과 밀접하게 붙어있는 게 철학이라면, 저도 그런 철학자가 쓴 책 만나보고 싶고 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과 이 주제를 매개로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약간 변형을 한 거죠.
나에게 대입했을 때 이게 맞겠다 싶으셨던 거죠?
네. 철학서점은 아니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정치적 상황, 사랑, 자연 같은 일상적인 주제들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들이 모여서 결국 철학적인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이 4가지는 쉬우면서도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모든 책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재밌는 건, 이런 기준의 토대를 <사랑예찬>에서 가져왔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무규칙_협동_큐레이션 태그를 걸어서 <사랑예찬>을 추천해준 거예요. 마침 저는 서점을 열기 위해 이삿짐을 꾸리는 중이었거든요. 덕분에 "이 주제로 밀고 나아가도 되겠다"는, 제 선택에 확신이 들었어요.
문제를 내지 않았는데 정답을 맞힌 사람이 나온 기분이었죠. 춤추고 싶었어요.
사람들에게 책추천을 받고 그걸로 큐레이션하겠다는 건,
혼자서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자연스럽게 만나는 거니까.
이렇게 계속 확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가장 인상깊었던 손님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대답이 나왔네요
보통 책 전시는 표지를 보여주는데, 무명서점은 책 뒷면을 보여주거나 포스트잇을 붙여서 특정 페이지에 마크를 해놓는 방식으로 진열을 하잖아요. 이런 디테일은 어떻게 나온 건가요?
뚜렷한 계획을 가지고 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큐레이션을 통해 받은 책들이 많다보니 한 권이 다 특별해보여요. 이 책은 언제 읽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도움이 됐다는 사연을 듣고 나면 그 책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책을 만든 사람들이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를 잘 반영해서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편이기도 해요. 책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거잖아요.
아무리 좋은 큐레이션을 해도 결국 알라딘으로 싼 가격에 굿즈 받으면서 사면 서점은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옷 사는 것도 그렇잖아요. 굳이 여기서 책을 사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흐읍.. 한 달 좀 넘은 상황에서 그 이유를 말하기는 좀 어려운데요. 다만 다른 곳과 다르다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여기에 있는 책들은 당신만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각자 추천한 1권의 책들이 모여있다. 누군가에겐 인생 책이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여기에서 산 책을 구매하면 그 자체로 큐레이션에 동참하는 거고 또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필터가 된다는 거죠.
*무명서점 인스타그램에는 #해시태그로 추천받은 책과 서점에서 팔린 책이 그날그날 업로드 된다. 소규모 오프라인 공간에서만 가능한 휴먼 큐레이션이다.
책에 대한 애정, 이곳에 와야 하는 이유, 이곳에서 사야 하는 이유를 모두 들었다. 약간의 모호함이 있긴 하지만, 정성적인 부분을 꾸준히 공략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2018년 목표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골라준 책을 입고하고, 오늘 온 사람들이 어떤 책을 골랐는지 보여주는, 이 2가지 줄기가 점점 뚜렷해지고 저는 투명해지는 것. 저는 그걸 도와주는 역할에 도가 텄으면 좋겠어요.
방문객이 어떤 공간으로 느꼈으면 좋을 것 같나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문턱이 낮은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누가 책을 추천했다 라고 하면 쉽게 들렀다 갈 수 있는 그런 공간이요.
그럼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옮길 의향도 있으신가요?
아뇨(단호). 제 성향상 그건 힘들 것 같아요. 불특정 다수가 몰려드는 걸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제가 좀 내향적이라. 이 정도가 딱 좋은 거 같아요.
내일 계획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
6시에 일어나서 투잡 일을 끝내고, 1시부터 운영을 시작하죠. 그리고는 무규칙협동 큐레이션으로 추천받은 책을 발주하고, 어제 북콘서트가 끝났는데 다음 행사로 제주에 있는 배우와 함께 낭독회를 계획하고 있구요. 또 재밌는 걸 하려고 하는데, 사람들이랑 모여서 서점 조립 놀이를 해볼까 생각중이에요. 서점이라고 해서 책읽기만을 요구하는 건 조금 가혹한 요구잖아요.
재밌어보인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려움, 현실적으로 힘든 점을 듣고 싶었는데 이렇게 재밌는 일만 벌이고 있다니...
끝으로 더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저는 제가 부각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책방을 준비하면서 이곳이 저만의 공간이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서부터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인터뷰처럼 모두에게 노출되는 일이 익숙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 서점에서 사람들이 골라간 책, 사람들이 골라준 책만 남고 저는 투명해졌으면 좋겠어요.
서점이라는 공간은 "내"가 많이 들어갈거라고 생각했다. 내 취향, 관심사, 인테리어, 음악 등등 모두 다. 그런데 인터뷰 첫 질문부터 대면서비스업이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후에도 줄줄이 다 사람이다. 가구, 인테리어, 큐레이션, 손님응대까지 전부 다. 상상과는 다른 전개다.
물론 손님이 오고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무명서점이 연대라는 측면에서 좀 더 두드러진 사례일수도 있겠지만 은연중에 서점은 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인식했었나보다. 그래서 결국 너는 어떤 공간을 만들겠냐 하고 물으면 아직 대답이 궁색하다. 그래도 나만의 정답을 찾기 위한 질문 하나와 사례 하나를 얻었다. 다음 인터뷰에서 또 확인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