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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May 24. 2018

차분하게 정리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노트북 덮고 펼쳐든 따듯한 지침서 <3월의 라이온>

0. 휩쓸리는 기분

죽어라 야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 출근한 것도 아닌데 정신없이 일주일이 지났다. 출근해서 언제 생겨났는지 모르는 일을 쳐내고, 진행중인 프로젝트를 모니터링하고, 인터뷰 글까지 정리하고 나면 오늘 했던 일들을 정리할 여유조차 사라진다. 하루의 밀도가 빡빡해지니까 퇴근 후의 시간에도 여유가 없어졌다.


평일 저녁이 되면 월급보다 시간이 더 부족한 느낌이다. 왠지 억울한 마음에 남은 시간을 알차게 쓰려고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다닌다. 놓친 소식을 따라잡고 재미가 보장된 콘텐츠를 허겁지겁 소비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알찬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틈을 없애고 있다. 페이스북에 넘치는 인사이트와 새로운 트렌드를 다 받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나의 생각을 찬찬히 정리하는 시간마저 줄이고 있다. 인풋만 더럽게 많아졌다.


스마트폰이 생긴 뒤로 이런 종류의 생각을 여러 번 했고 비어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아직도 채우기에 급급한 일상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꾸역꾸역 채우는 게 너무 지친다 싶을 때 노트북을 탁! 덮고 꺼내드는 지침서가 책장에 꽂혀있다는 사실이다.



1. 촘촘한 생각을 따라간다는 것

만화 <3월의 라이온>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승부사다. 승부가 직업인 삶은 어떨까.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게 아니라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대결해서 매번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그걸 12번쯤 반복한 결과로만 평가받는다면. 난 그걸 견딜 수 있을까. 패배에 대한 스트레스를 20년 가까이 달고 살아야 한다면. 답은 뻔하다. 그건 절대 내 타입이 아니다.


대신 안전한 곳에서 천재, 노력파, 백전노장이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부딪히는 프로 장기기사의 승부를 보고 있으면, 어른들이 삼국지를 꼭 보라고 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장기는 국가 간 대결을 축소해놓은 두뇌 스포츠다


장기는 세계관이 확고하지 않으면 금방 밀려나는 판이지만, 최정상급 기사의 승률도 겨우 4할에 불과하니 아무도 쉽게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점검하고 발전시키는데 혈안이다. 잠깐의 흐트러짐이 악수를 낳고 그 악수가 패배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살아남은 프로는 어느 것 하나 대충 뭉개고 넘어가는 법 없이 집요하다. 그들의 생각은 촘촘하고 빽빽하다. 그리고 그 생각과 생각이 부딪혀 승패가 결정된다.


이 사이클을 무수히 반복한 끝에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그 사이사이에 내 생각을 끼워넣게 된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짐작하며 머리속을 정리해나가는 것이다.



2. 무게를 버틴다는 것

특히 8권에는 각자의 절실함을 걸고 승부에 임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66살에 A급 현역으로 활동하는 야나기하라씨는 그 자체로 이미 동경의 대상이지만 어깨가 무겁다. 바둑계 최연장자인 건 물론이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일한 현역으로 남아 '건재한 장년'의 상징이 되었다. 내 몫까지 최선을 다해달라는 친구들의 기대와 지게 될 경우 강등은 물론 은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한몸에 지고 타이틀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


나한테서 일을 빼면 뭐가 남지?


은퇴를 앞둔 이 노장의 고민이 남의 일같지 않았다. 은퇴한 아빠의 고민이자, 내가 다니는 직장을 빼고 자기소개를 하고싶은 나의 고민이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주변에 털어놓을 지인이 있지만 야나기하라의 고민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라서, 공감해줄 사람도 의견을 물을 선배도 없다. 오랫동안 삭힌 고민이 흐른다.


그가 처음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다. 모든 게 불타버린 허허벌판 위에 혼자 서있는 것 같은 두려움. 일생을 바쳤지만 남은 건 주변 사람들의 무거운 기대와 병든 육체밖에 없는 것 같은 공허함.


그렇게 두려움을 안은 채로 몇년 동안 결론을 내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답을 알 수 없다. 그러다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대국 중 수세에 몰린 순간, 야니기하라의 생각이 또렷해진다. 자신은 불타버린 허허벌판이 아니라 여전히 활활 타고 있는 현역이라는 사실. 그리고 다시 두는 한 수.



그렇게 생각은 한 걸음 더 나아갔고 승기를 잡는 듯 했다. 하지만 상대방도 만만치않다. 느티나무처럼 느릿느릿 단단하게 성장한 시마다가 지지않고 응수해오자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을 때쯤 다시 한 번 생각이 바뀐다.


있는 힘껏 노력해 온 사람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이
불탄 허허벌판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



벌판에 불이 타고 나면 순식간에 다시 풀이 자란다. 온사방이 풀로 뒤덮힌 들판을 다함께 보고싶다는 마음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게 만들었다. 부담스럽기만 했던 친구의 기대가 버팀목이 된 것이다.



3. 생각을 정리할 타이밍

야나기하라의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면 마지막에는 숭고함까지 느껴지는데, 생각의 흐름과 관련해서 내가 주목한 건 전체적인 구조였다. 그의 고민은 타이틀 방어전에서 출발한다. 타이틀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그의 머리를 움직이게 했고, 대국 중간에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생각의 전환을 불러왔다. 상당한 압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생각이 명료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도 설득력 있다.


힘에 부치는 순간은 평소에 뭉개버린 생각을 정리할 기회다


언젠가 녹초가 되었을 때 떠올릴만한 지침이다. 만화책 한 권으로 나의 일상이 바뀌는 건 너무 과한 기대겠지만, 실제로 도움이 된 생각도 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는 기억을 원했다." <3월의 라이온> 초반부에 등장한 주인공의 대사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스스로를 100% 믿을 수 없게 되고, 자신감이 떨어진다. 떳떳함은 결정적인 순간에 성패를 좌우하는 기억이다.


한동안 머리속에 이 생각이 맴돌면서 강제 자아비판과 반성의 시간을 거친 뒤에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 끝까지 해둬야 마음이 편하다. 일에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혹시 저번에 어물쩍 넘긴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나' 하는 걱정을 하지 않으려면 이번에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다.


언제부턴가 이 사고방식이 일을 적당히 해치웠다는 기분이 들 때쯤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번아웃이 찾아오거나 밀려오는 일에 지칠 때는 야나기하라가 스멀스멀 나타났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질문에 답을 할 기회라고. 어렴풋한 짐작에 명료한 언어를 부여할 타이밍이라고.





<3월의 라이온>은 매번 이런 식이다.  승부의 세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본다음, 꼭 우정이나 가족의 가치를 재발견하면서 마무리된다. 뻔한 신파가 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순진하거나 동화적인 결론으로 덮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위로를 건넨다. 그래서 에피소드가 마무리 될 때쯤에는 오히려 승부의 세계가 판타지이고 가족 안의 모습이 일상적인 세계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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