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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Jun 18. 2018

밑천이 드러나면 글을 쓰자

난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밑천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거? 그냥 대충했어. 내 타입 아니라서." 누가 물어본 적도 없는데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레퍼토리다. 어차피 최선을 다한 게 아니니까 B+이면 무난하지.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조금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면, 성공이 주는 짜릿함보다  구린 결과물을 만들었을 때의 두려움이 20배는 더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순간마다 천재와 대가들의 작품을 본다. 직접 부딪히고 배우는 것보다 감탄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물론 그 후에 현실로 돌아오면 이미 기준치는 비현실적으로 높아져있다.


천재들은 눈만 높여놓고 떠났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조건이 너무 많은 탓일까. 아니면 내가 전혀 관심없고 싫어하는 것까지도 잘해야한다는 압박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서 마주하는 내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초라하다.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과 비교하는 찌질한 마취제도 이 시기에는 효과가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조차 열심히 하지 않았다


별로인 게 들통날까봐 최선을 다하지 않다 보니 어느새 밑천이 없어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모임에 나가 내 생각을 말하려고 했지만 재미있는 실패담도, 작은 성취감을 맛본 뒤에 남은 생각도 다 남의 이야기였다. 얼마 되지 않는 나의 이야기를 쥐어짜내듯 꺼낼 때면, 오락실에서 마지막 남은 동전을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심정이었다. 이걸 얘기하면 끝인데..


페이스북 셀럽의 이야기를 열심히 좇아갔다. 이걸 알고 있으면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척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대화를 시작하면 핑퐁 한번으로 허무하게 끝나는 얕은 정보가 오래 갈리 없었다. "~~라고 하더라" 다음에 이어지는 정적.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내 생각인 것처럼, 내가 배워서 얻은 지혜인 것처럼 꾸몄다는 걸. 빈 속에 잔뜩 술을 들이부은 다음날처럼, 토하려고 해도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겨울철의 나무마냥 황량했다..


그렇게 알맹이를 드러내지 못한 날이면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가장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유형인 주관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밑천이 드러날수록 더욱 남의 경험을 눈으로 좇는 일에 몰두한  대처방식은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었다.




그래서 계속 쓰기로 했다

남의 얘기, 어디서 들었던 내용 말고 내 생각이 필요하다. 과거의 나는 틈만 나면 공상했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걸 하나의 다면체처럼 머리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는 시간을 즐겼다. 집앞으로 가는 버스에서 번뜩 떠오른 생각을 되뇌이기도 했고, 풀리지 않던 질문이 꿰맞춰진 순간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에 썼던 글을 보면 더러 미숙한 부분이 보이지만 흥미로운 발상이나 관점도 있다.



무엇보다, 생각을 이어가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피곤하니까 그냥 여기까지만 생각해야지. 하는 식은 잘 없었다. 생각 자체를 즐기기도 했지만, 쓰고 나면 대체로 선명해진다. 내가 어디서 생각을 대충하고 넘어갔는지가 보인다. 글이란 녀석은 구조에 기대고 있으니까. 그래서 자꾸 덧붙이고 수정하게 된다. 생각을  눈으로 보면서 자꾸 보완해나가면 평소의 나보다 더 괜찮은 글을 쓸 수도 있다.


"나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못 쓸 수도 없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발견한 이성복 시인의 말이다. 공감도 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글을 쓰면서 하게 되는 깊은 생각이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의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인 척 하는 글은 언젠가 들통나겠지만, 그럼에도 글을 써야만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 현재의 나를 원본 그대로 출력하는 작업은 글쓰기의 시작에 불과하다.


내 안에 있던 모든 글자를 꺼내 정리한 걸 보고 있으면, 다음 페이지에 무엇을 써야할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ctrl+s 를 누르느라 바빴던 머리가 마침내 글 안에 있던 하이퍼링크를 클릭해보고, 주석을 달고, 새롭게 발견한 정보로 후속작을 쓸 여유를 되찾는다. 글쓰기는 새벽 6시에 간신히 완성한 1편 원고를 보내고, 오전 8시까지 다음 이야기를 쓰는 일이다.


그래서 글쓰는 일은 늘 새롭고, 괴롭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를 다 쓰고 난 다음의 뿌듯함은 다른 어떤 경험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감각이다. 더군다나 다음 페이지가 차곡차곡 쌓이는 게 눈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그 뿌듯함은 배가 된다. 밑천이 드러나도, 쓰는 만큼은 쌓을 수 있다.



이야기는 출력할수록 흥미진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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