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성훈 Jun 28. 2018

혼자있고 싶지만 외로운 건 싫을 때

전직DJ 현직DJ 원래DJ가 모인 이유

0. 아티스트가 (다시) 라디오를 시작한 이유는

나의 덕후 바이오리듬 유지에 있어 눈의 위상은 (안구정화+시력감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최근 2달간 귀의 중요도가 점점 올라가는 중이다. 물론 여전히 대세는 인스타그램과 YouTube지만 갑자기 음악 장르/경력/활동영역에서 접점이 없는 가수들이 비슷한 시기에 자신만의 라디오를 시작한 거다. 에픽하이, 나인(디어 클라우드), 문별(마마무), 세라(전 나인뮤지스) 모두 공중파가 아닌 자신의 채널에서 라디오를 표방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갑자기 ?


일단은 너무 반갑다. 2008년 꿈꾸라 시절의 타블로를 기억하는 팬으로서, 잇츠힙합이 돌아온 듯한 장난스러움이 감격스러울 지경이다. 고2~고3 시절 꿈꾸라를 계기로 라디오라는 매체에 빠졌고, 대학시절 내내 라디오 작가를 꿈꿨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푸른밤 성시경입니다 등 좋다는 라디오는 찾아듣고 챙겨들으면서, 시작하는 시간에 딱 맞춰 오프닝을 받아적었다. 그걸 매일 했다.


아, 매일은 아니었나보다...


그리고 노트에는 이런 코너를 만들면 재밌겠다 싶은 생각에 적은 기획 아이디어에 타이틀까지 붙여가며 끄적였다. 이를테면 청취자가 사연을 보내면서 0월 0일 0시에   읽어달라고 주문했을 때 딱 그 시간에 맞춰 DJ가 사연을 읽어주는 컨셉의 <사연 타임캡슐> 같은 것. 라디오 특유의 1:1 커뮤니케이션 감성과 생방송이라는 특성을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하던 시절 라디오에 빠졌던 그  특별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TV에 나온 연예인을 보면 싸인을 받고 싶지만, 길가다 라디오 DJ를 만나면 막 친구 만난 것 마냥 반갑고, 인사하고 싶다. TV 프로그램이 종영하면 이제 뭐 보지?를 고민하지만, 라디오가 끝나면 DJ와 청취자는 애인이 유학을 떠나는 것처럼 눈물을 흘린다.


이런 시청자와 청취자의 온도가 아마 뮤지션들이 (다시) 라디오를 시작한 이유가 아닐까. (한때) 라디오작가 지망생이자 라디오키즈라고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라디오에만 있는 매력을 하나씩 꼽아봤다.


안녕하세요 전직DJ 타블로, 현직DJ 미쓰라, 원래DJ 투컷입니다



1. 라디오니까 가능한 것들


우리끼리만

라디오는 밀실이자 광장이다. 이어폰을 끼고 혼자 듣지만 나와 비슷한 일상을 공유하는 청취자와 사연을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연결된 느낌을 받는다. tv가 예능 전문 웃음치료사라면 라디오는 공감 전문 외로움치료사다. 라디오에서는 부스에 앉아있는 DJ를 매개로 평소에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을 이해한다는 비밀스러운 연대감이 형성된다.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로운 건 싫은 그 모순적인 감정을 정확히 어루만져준다는 느낌은 라디오가 선물하는 가장 강력한 경험이다.


자연스레 우리끼리만 아는 암호와 언어도 생겨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행위는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구분짓는 행위다. 그래서 법조계, 군대, 마케팅 용어는 바깥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다. 업계 전문용어, 인사이드 조크, 신조어는 모두 내부 결속력을 공고히 한다. 라디오에도 우리끼리만 통하는 단어가 있다.


까만하트

꿈꾸라를 들었다면 모두가 아는 그것. 문자사연 보낼 때 마지막에 꼭 특수문자 써가며 붙였다는 그 까만하. 최근에 에픽하이가 OK GOOD 라디오를 시작하마자 '마즙'과 '밥상'을 인사이드 조크로 만들어버렸다.


인사이드 조크가 '우리끼리만'의 친목을 다진다면, 앨범/신곡/공연 선공개는 정보 비대칭을 만들어낸다.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을 추가하는 거다. 에픽하이는 라디오를 통해 자신들의 여름 콘서트 <현재 상영중>에서 단독 매거진을 발행하고, LOST MAP 앨범도 판매할 예정이라고 알려왔다. 프라이빗한 정보공유는 덕후들의 (자)부심을 부풀어오르게 하는 제 1 요소다.



안부, 근황

어느 방송사의 무슨 라디오든 고정게스트가 나오면 85%는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연애상담이든, 고민사연이든, 주제선곡이든 관계없다. 근황토크는 절대 빠지지 않고 가장 처음 등장한다. 별 감흥없이 짧게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DJ와 게스트의 합이 좋을수록 근황은 길어진다. 집에 반려견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하는 게스트와 그냥 잘 지냈어요 라고 형식적으로 좋음을 공유하는 게스트 중 누구에게 더 이입하고 감정교류가 더 많이 발생할까.


 무한긍정 자랑파티가 인스타그램의 정체성인데..


디어클라우드의 보컬 나인은 매주 목요일 저녁 11시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진행하며  메인코너인 선곡과 함께 반드시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어제는 앨범 타이틀곡의 일본어 버전을 녹음했고, 요즘 기분이 우울한 것 같고 사실 평소에도 대체로 좀 우울한 편이라는 것까지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라디오에서 근황토크란, 읽어야 할 대본이  쌓여있고 코너 진행할 시간이 모자라도 나는 당신이 어떻게 지냈는지가 더 궁금해. 라는 메시지니까. 요즘 어떤 일을 했고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를 공유하는 게 핵심이다. 안부를 묻는 사이임을 감안하면 DJ마다 애칭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도 어색하지 않다.




사연

사연을 직접 읽고  대답한다. 이런 포맷이야 배끼면 그만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시스템도 아니고 최근에는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개인방송이 많아졌으니까. 하지만 아프리카TV든 인스타그램이든 대부분 라이브 위주로 진행된다는 게 맹점이다. 시청자가 많을수록 즉시성과 휘발성만 높아진다. 개인의 '사연'은 낄 자리가 없다. 사연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느껴지는 우여곡절이나 복잡한 사정과 정반대되는 포맷이 실시간채팅이다.


지상파 라디오가 사연 주소와 게시판을 별도로 만들고, 가만히 있어도 질문이 달리는 개인채널에 괜히 사전 질문 받는다고 공지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근황과 사연을 주고받는 라디오는 진행하는 사람을 좋아해야 하고,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본질인 매체다.



2. 디지털 시대, 밀레니얼 세대의 개인브랜딩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집에 컴퓨터가 있던 나같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디지털은 디폴트다. 그리고 인터넷이란 어린 녀석의 가장 큰 콤플렉스는 시간이다. 모든 것이 복제되고 빠르게 변하는 온라인 세계에서 축적된 시간은  더이상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희귀하고 힙하기까지 하다. 포틀랜드의 크래프트맨십이 대표적인 사례다.


라디오작가 지망생 시절 떠올렸던 <사연 타임캡슐>의 가장 큰 매력도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는 것에 있다. 기대하게 만들었다가 빵!하고 터트리는 순간까지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는 호흡을 길어지게 만드는 구성인 것이다. 오랜 시간 감정을 이입했던 경험은 쉽게 만들 수도 복제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공연 티켓이나, 한정판 굿즈는 되팔이가 가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쌓인 덕력은 사고팔 수 없다. 오로지 나의 관심과 시간을 투자한만큼 덕력을 증명할 수 있는 포맷이 있다면?


라디오는 기획력이나 채널의 파급력보다는 청취자의 사연과 DJ가 반응하는 상호작용 방식이 성공을 좌우한다. 그러면 아티스트 입장에서도 라디오는 가장 확실한 내 편이 있는 곳이자 더 많은 팬을 만드는 곳이 아닐까.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앞으로도 Fan, Membership/Subscription, Community, Reputation 과 같은 키워드가 중심에 놓인다면 라디오는 지금의 책이 주목받는 것과 같은 이유로 재미있는 발전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Reputation business 영역에서는 강연, 방송출연, 네트워킹 등의 경제적 이익을,

Fandom business 영역에서는 멤버십 가입(=정기구독), 굿즈 판매 등 커뮤니티 형성을.


더 긴밀하게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라디오의 가장 큰 동력이다. 나조차 유튜브 영상을 만들 당시 조회수 80만 건을 넘겨도 공허했고, 지금은 브런치 조회수가 1만 건이 넘어도 금방 심심해진다. 오히려 조회수에 비해 댓글이 적으면 잘못 만든건가 하는 의심이 피어오른다. 반대로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구체적인 포인트를 짚어낸 댓글 하나의 여운은 꽤 오래간다.


 좋아요와 하트는 1초 만에 누르고 0.5초 뒤에 잊혀지는 감정표현이다.


우리는 클릭이 아니라 감정교류를 원한다



p.s.

서태지도 이참에 라디오 진행했으면. 옛날 곡 비하인드 하나씩 얘기하고 새로 산 RC카 자랑하고, 밴드 멤버  갈아만든 신곡 발표하고(피크가 닳아서 새 거 샀다는 후기도 들려주고..) 일주일에 한번씩 30분짜리  편집본  들려주면 얼마나 좋아. 이제 좀 더 자주 꽁냥꽁냥 해볼 때도 되지 않았나..

매거진의 이전글 재미와 성과의 교집합을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