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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Jul 18. 2018

무기력한 눈을 반짝이게 만드는 법

남들과 달라도 괜찮은 도시, 타이베이를 기대하며

0. 더워서 아무것도 못하겠는 걸

15년째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여름은 대체 왜 있는 걸까. 나에게 여름이란 지하철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났다는 이유만으로 교통안전공단을 저주하게 만드는 계절이다. 겨울이면 가만히 있어도 방전되는 소니카메라 배터리처럼, 여름이면 내 인내와 체력은 바닥을 친다. 특히 이번 여름은 유난히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분명 겪은 적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재수생 시절, "분하고 억울해서 SKY 가고 말겠다" 던 3월의 비장한 각오는 여름을 기점으로 증발했다. 시간이 지나고 기온이 올라가면서 나태해진 것이다. 평소같았으면 끝까지 채웠을 할당량도 "여기까지만." 하고 끝내는 일이 늘었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늘 계획의 90%만 채웠다고 해서 당장 성적이 떨어지지는 않으니까. 그때는 느끼지 못했다. 텐션이 떨어진 상태가 지속되면 몸은 빠르게 90%를 정상수치로 인식하게 된다는 걸. 그리고 90%가 80%로, 80%가 70%로 떨어지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진다는 걸. 경험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기어코 성적표에 찍힌 숫자를 확인한 다음에야 느낀 것이다.


나태함의 결과는 자괴감과 비참함이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다시 찾아왔다. 한창 힘이 넘치던 2~3월에 뿌렸던 씨들은 거의 자라지 않은 것 같고, 벌써 직장 사춘기가 온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게 남들이 말하는 인생노잼 시기인가 싶고.. 뭐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뭘해도 시큰둥. 출구가 안 보인다. 여름이 왜 있냐던 푸념은 조금 더 진취적인 의지로 진화했다.


1년 내내 가을인 나라에 살자!


지금, 여기에서 해결책을 찾지 않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는 못난 습관이 다시 발동한다. 하지만 새로운 자극을 얻고 텐션을 끌어올릴 방법으로 여행만큼 확실한 게 없기도 하다. 장소가 아니라 관점을 바꾸라는 말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일단 어디든 떠나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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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결정권자(=월급)가 쪼잔하면 디테일하게 챙겨야 할 부분이 많아진다. 내일 당장 떠난다는 건 그만큼의 비행기값과 숙소비용을 감당하겠다는 얘기다. 잘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지친 것 같지는 않게 느껴진다. 우선 갈만한 곳을 발굴해보자.


후보1. 도쿄

아쉬움과 좋은 기억이 함께 있는 도시. <퇴사준비생의 도쿄>를 보고 재작년 겨울에 다녀왔고, 이번에  다시 가면 또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가고싶은 가게와 공간이 추가됐고 즈니스 면에서는 여전히 배울 점이 많다는 게 특장점. 지난번엔 머리속이 취업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내내 우울했으니 일종의 리프레쉬 여행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심히 지쳐있는지라. 기각.


후보2. 홍콩

<중경삼림>의 도시. 쇼핑에는 관심없지만 10년만에 왕가위 뽕이 다시 찾아오는 바람에 '떠나고 싶은 도시' 차트 2위로 신규 진입함. 영화 로케이션을 따라가기만 해도 재밌을 것 같고, 야시장 샌드위치 가게에 가면 막 왕페이가 있을 것 같고, 길거리에서는  California Dreaming이 흘러나올..리가 없으니 영화는 집에서 다시보기로. 무엇보다 '따라가는' 테마여행은 개성도 취향도 없는 것 같아 끌리지 않는다.


후보3. 대만

작년 여름이었다. <여행에 미치다>에 대만 여행기가 미친듯이 올라왔는데 대체 뭐가 좋다는건지 공감이 안 갔다. (요즘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후기가 올라오는데, 경험자로서 말리고 싶다..) 당시 내 머리속에 '대만 = 딘타이펑'밖에 없었지만 올해는 다르다. HTC의 나라. 영롱한 디자인, 구글에서 카메라팀을 통째로 인수할 정도로 짱짱한 화질, 삼성 or 애플의 플래그십 시장에서 소프트웨어로 밀리지 않는 거의 유일한 대안! 폰 사러 대만 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 나라도 날씨가 문제. 습도가 70%란다. 난 무기력한 거지 실성한 건 아니다.


인생노잼 시기에는 여행도 재미없어지는 걸까. 이렇게 쥐어짜듯 여행지를 고르는 건 처음이다. 궁하다. 생각만 해도 설레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그런 곳이.


그렇게 무기력하던 와중에 문득 책장에 (어김없이) 방치된 잡지 2권이 눈에 띄었다.


스파크는 의외의 장소에서 튀었다.



1. 눈이 반짝거리는 사람을 찾았다

최근 1년 동안 본 책 중에서 가장 도움됐던 책들은 대부분 잡지였다. 미디어 산업 뉴스를 한창 따라잡을 땐 브랜드 다큐멘터리 <매거진 B>의 넷플릭스, 애플 뮤직 이슈를 열독했고, 내 공에 대한 욕망이 커지던 시기에는 로컬숍 연구잡지 <브로드컬리>를 봤으며, 커리어와 직장생활 관련 문제는 경영잡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힌트를 얻는다. 잡지는 <맥심>, <리빙센스>와 동의어가 아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분 단위로 피드가 업데이트 되는 시대에, 월 단위로 발행되는 잡지는 트렌드를 정제하고 해석하는 리포트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도 아주 예쁜 리포트.


그러니 도시 큐레이션 잡지 2권이 모두 동일한 장소를 선정한 건 우연이 아닐 거다. 이런 생각에 호기심이 동해 책을 샀다. 얼마나 스토리가 넘치는 도시이길래 nau 매거진이 300페이지를 쓴 건지(판형도 크면서). 이 꿉꿉한 도시를 다루면서 표지는 오렌지색에, 감각적인 사진까지 갖다놓은 DOR라는 잡지는 또 무슨 생각인건지.


타이베이Taipei


작년 한 해동안 도시를 테마로 한 책들은 지겹도록 포틀랜드만을 다뤘다. 이제는 다른 얘기를 할 때도 됐다고 느껴왔다. 아무리 그래도, 타이베이라니. 좀 뜬금없지 않나. 인디음악으로 핫한 태국도 아니고, 젊은 스타트업 열기가 왕성한 베트남도 아니고, 비즈니스 중심지 홍콩, 싱가포르도 아니고. 타이베이라니. 공감은 잘 안되지만 페이지를 슬쩍 넘겨보니 에디터의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입맛 없을 때 누군가 맛있게 먹고 있는 걸 보면 덩달아 먹고 싶어진다. 누군가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의 멋짐에 대해 침튀겨가며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으면 갑자기 관심이 생긴다. "나도 한 번 해볼까." 누군가의 반짝거리는 눈을 유심히 살피.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2. 타이베이에서는 남들과 달라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내가 관심이 전~~~혀 없는 분야에 대한 일장연설만큼이나 괴로운 것도 없지 않나. 저 사람의 관심과 내 관심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나는 천상 걱정이 많다. 사고방식이나 취향이 어느정도 비슷해야 할텐데. 이런 점에서 잡지는 확실히 편하다.


발행인의 글을 보면 이 잡지가 어떤 시선으로 대상을 다뤘는지 선명하게 알 수 있으니까. 이 공식은 이번에도 들어맞았다. <nau magazine> chief editor 신유미님의 글에서 단박에 눈치챘다. 타이베이는 내가 지향하는 살기좋은 도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걸.


도시 속 그들이 행복한 삶을 지속 가능하도록 하는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마도 그것은 타이베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그들의 마음 속에 담겨져 있는 타인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신념과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요.


학력, 집, 키, 몸매, 심지어 개인의 성격과 정체성조차 '남들만큼'의 틀에 끼워맞추려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타인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신념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대만이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 금지에 대한 위헌판결을 내렸다(2017년)는 대목을 읽으며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이루어진 세계 최초의 동성결혼식(2001년)을 떠올렸다. 그리고 환호했다.


찾았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나라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 스웨덴 홍보청 슬로건인 "스웨덴에서는 실패해도 됩니다" 만큼이나 매력적이다. 후자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좌절하지 않도록 안전망을 갖추고 있다면, 전자는 개인으로서 지닌 결핍과 개성을 자기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지지한다.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감각은 아시아에서 정말 드물게 제공하는 경험이다.


타이베이 지하철의 박애석博愛席 시민들의 일상에서 포용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기능으로만 보자면 박애석은 노약자석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단어에서 느껴지는 관점의 차이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장애인이 지하철에 탔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의 노약자석은 노인 또는 약한 사람만 앉을 권리가 있다. 우리의 배려는 그들을 약자로 볼 때만 작동한다. 하지만 박애석은 약자가 아닌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서 타인을 바라본다. 박애는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는 행위니까. 한쪽은 자리에 앉기 위해 누가 더 약자인지 드러내야 하고 다른 한쪽은 모두가 조화를 이룰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물론 쉽게 답을 내릴 문제가 아니다. 다만 곳곳에 장애인이 이동하기 편한 시설이 있고, 퀴어 퍼레이드가 성대하게 열리는 곳에서 내가 나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구성원의 의견이 얼마나 자유롭게 공유되고 반영되는지는 인터넷 개방성에서 드러난다. 마치 인쇄술 발달이 정보격차를 줄인 것처럼, 모든 정보를 검색하고 공유하는 공간인 인터넷은 태생이 민주적이다.


도시 전역에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정책은 타이베이가 얼마나 개방성에 가치를 두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디지털 시대에 이보다 강력한 증거는 없다.



3. 고해상도 타이베이

nau magazine의 키워드가 다양성이라면, DOR의 키워드는 대중문화다. 영화, 책, 차, 영감이 어떻게 타이베이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보여준다'에 방점이 찍힌다. DOR에는 발행인의 글 따위 없다. 목차를 넘기면 곧바로 30페이지 분량의 사진들이 이어진다.


순서대로 읽는 책이 아니다


스냅사진처럼 넘기면서 보도록 설계된 책이다. 페이지를 후루룩 넘겨가며 끌리는 이미지에서 멈추고, 재미있어 보이는 꼭지를 읽어가면 된다. 거기서 얻은 '인상'이 이 책의 본령이다. 나는 꼭 텍스트를 볼 거야라고 마음먹고 뒤적여도 소용없다. 이 잡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보여주고, 질문을 던질 뿐이다.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칼럼은 없다시피 하고 pictorial과 interview만 보인다.



평소 같았으면 사진으로 가득한 잡지에 흥미를 덜 느꼈겠지만, 이미 타이베이에 애정이 생긴 뒤라 뭘 봐도 좋았다. 처음엔 독립서점이 마음에 들었다가 다음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가 궁금해졌고, 다소 심심하다고 느꼈던 차tea 문화도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게다가 이곳만의  정취를 간직한 인디밴드는 화룡점정.


남들처럼 하느라 시간을 뺏기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관심과 흥미에 시간을 쏟은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멋있다는 표현을 쓴다. DOR는 개성이 한껏 드러난 가게와 예술작품의 멋에 주목한다.



그래서 같은 가게를 소개해도 nau는 텍스트가 길게 달리지만, DOR는 가게의 분위기와 사진 레이아웃에 공을 들인다. 인터뷰를 활용하는 법도 다르다. nau는 질문 하나에 10문장이 넘는 답변이 달리기도 하지만  DOR는 간결한 질문과 3문장 이내로 정리된 답변이 이어진다. 자간도 넓다. 텍스트가 아니라 디자인으로 소통하겠다는 의지가 곳곳에 배어있다.


이미지와 디자인은 다르다. 디자인(design, 설계)이미지에 사람의 행동변화를 유도한다는 의도가 개입되는 순간 탄생한다. 이러한 디자인적 관점은 대만을 대표하는 서점을 다룰 때에도 책 큐레이션보다 24시간 운영이라는 방침에 주목하게 만든다. 퇴근 후 갈곳이 없어 술집을 전전하던 직장인은 (야근 후에도) 불이 켜져 있는 청핀서점을 보고 발길을 옮기게 된다. 사람의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서점 하나가 퇴근 후의 풍경을 바꾸어놓는 일, 사람의 습관을 바꾼 사례는 그래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DOR는 그렇게 수많은 디자이너가 사람들의 습관을 고민하듯 대중문화가 타이베이 시민의 일상에 미친 영향에 현미경을 대고 셔터를 누른다.



마치 팀장A에게 보고할 땐 한장 짜리 word 문서를 작성하고 팀장B에게 보고할 땐 keynote에 쓸 사진 레퍼런스부터 찾는 것처럼. 두 잡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 덕분에 나는 상무가 된 기분으로 팀장A의 보고서에서는 도시의 정체성을 탐닉하고, 팀장B의 키노트에서는 예쁘고 친절한 디자인을 만끽했다.


타이베이의 일상을 고해상도로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래, 타이베이로 가자!



4. (수시로 써먹을 수 있는) 텐션 끌어올리기 노하우

어라, 결론이 이상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분명 여름은 왜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됐고, 습도 70%는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날씨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랴. 타이베이의 다양성과 개방성은 대체불가능한 매력이다.


대만 역시 우리나라처럼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근 몇십년간 압축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국민정서는 정반대인 것 같다. 대만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나의 개성을 찾는데에 익숙하다. 반면 우리는 너무 오래 '우리'만을 강요했고 빨리 가기에 혈안이다.


어쩌면 다분히 아시아적 배경을 가진 도시에서 더 많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대단한 깨달음을 얻으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살고 싶은 도시에 가보는 것만으로 흥미가 돋는다.


여행 계획을 짜보자. 찾아보면 문구 덕후의 안식처도 있고, 은혜로운 관광지 '고양이 마을(허우텅)'도 있다. 일단 기분 좋아졌다.


또다시 무기력의 끝에서 엉망이 된 결과물을 보지 않으려면, 스스로 텐션을 끌어올릴 방법을 익혀야한다. 당분간은 내 취향의 공간을 발견하고 지도에 별표를 늘려가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보자. 굳이 탕진잼이 아니라도 세상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그러니까 그만 좀 사자ㅠ).






p. s. 대만에는 애플 개발자, 트렌스젠더, 최연소 장관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한 사람이 있다. 질문과 답변 곳곳에서 대만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 nau magazine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인터뷰. 전문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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