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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Dec 06. 2024

술을 줄여보겠습니다

<연필로 쓰기>와 <외로움 수업>을 읽었다

생애가 다 거덜 난 것이 확실해서 울분과 짜증, 미움과 피로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에는 술을 마시면 안되는데, 별수없이 술을 마시게 된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의 이야기다. 술 취한 자의 그 무책임하고 가엾은 정서를 마구 지껄여대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지껄이고 낄낄거리고 없는 사람 욕하고 악다구니하고 지지고 볶다가 돌아오는 새벽들은 허무하고 참혹했다.(김훈, <연필로 쓰기>, 42p)


8년 전 이직을 하고 지금의 직장에 와서 정말 술을 많이 마셨다. 물론 예전 직장도 술을 많이 마시는 곳이었지만 그곳에서는 업무와 회사 분위기 때문에 마셨다면, 이 회사에 와서는 내 의지로 마시는 빈도가 많았다. 한 줌의 광인들에 의해 휘둘리는 예전 회사의 분위기가 싫어 이직을 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회사는 다 그런 곳이라는 걸 꽤 늦게 안 셈이다.


이 회사에서 두 번째로 만난 팀장은 지금 생각해도 상식 이하의 인간이었다. 그의 행태를 여기서 되새김질 하고 싶진 않지만, 그 사람을 만나고 겪은 스트레스를 언제부턴가 술로 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한껏 술을 마시고 취해서 그를 비롯한 회사 사람들을 욕하고 비난하는 게 술안주였다. 그런 행태가 습관이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술자리가 즐거운 것이 아닌 감정의 쓰레기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누구라도 씹으며 분노하거나 낄낄대다가 씁쓸한 감정으로 헤어지는 그런 폐허였다고 해야 할까.


한 때 꽤나 많이 마셨더랬다...


'없는 사람 욕하고 악다구니하고 지지고 볶다가 돌아오는 새벽들은 허무하고 참혹했다'는 김훈의 저 문장은 너무 정확하고 아프게 내 폐부를 찔렀다. 저런 못난 짓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뜨끔함 때문이었다. 맨 정신도 아닌 취한 머리와 마음으로 누군가를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치졸하고 결국 나를 갉아먹는 짓인지를, 난 너무 최근에서야 따끔하게 알게 되었다. 요즘 내가 회사에서 술자리를 가급적 피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이 때문이다. 유쾌하지 않은 내가 취했을 때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이젠 알기 때문이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번뇌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넘어져서 다치면 고통을 느낍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죠. 다친 경험을 끊임없이 소환해 자신을 탓하거나 남을 원망하는 일은 우리를 번뇌로 이끕니다.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대개 가라앉지만 우리가 집착하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고통은 우리를 과거에 가두고 계속해서 괴롭힙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첫 번째 화살이라면 원망이라는 고통은 두 번째 화살입니다. 첫 번째 화살은 맞아도 두 번째 화살은 피해야 해요. 외로움에 사로잡혀 타인을 원망하며 살아가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의 오늘 하루가 즐거워야 합니다.(김민식, <외로움 수업>, 113p)


김훈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로 나를 무겁게 꾸짖었다면, 언제나 경쾌하고 밝은 태도로 글을 쓰는 김민식 작가(前 MBC PD)는 살갑게 웃으며 나에게 말한다.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스스로 고통받지 말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라고. 신나고 재미있게 살기에도 짧은 인생이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왜 남을 신경 쓰고 미워하면서 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냐고 말이다. 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조바심을 내도 이 세상은커녕 주변에 있는 사람 한 명의 마음도 바꿀 수 없음을 안다면, 그냥 내 삶이 상처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온전히 아끼고 사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렇게 나보다 더 긴 인생을 살았거나, 더 깊은 혜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때론 꾸지람을 듣고, 때론 위로를 받는 경험은 참 소중하다. 직접 겪었으면 너무 힘들었을 고통이나 실수들을 먼저 겪어본 뒤, 그 길을 걷지 말라고 해주는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혀 상반된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두 사람의 책에서 이런 공통된 내용을 찾고, 그것으로 나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앞으로는 술을 좀 더 줄여볼 생각이다. 물론 기쁜 일로 축하를 해주거나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들과의 흥겨운 자리는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만, 내 마음이 힘들고 우울한 상태에서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취지의 술은 가급적 마시지 않으려 한다. 그런 자리가 끝난 후 황폐한 밤과 숙취에 찌든 아침을 맞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시간에 내 삶을 좀 더 즐겁게 만들 무언가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져볼 생각이다.


덧붙이자면... 내가 그토록 쓰레기로 간주했던 그 팀장은 아주 무사히 정년퇴직을 했고, 난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누굴 미워하고 저주하는 게 다 부질없음을 이렇게 확인한 셈이다. 그러니... 그냥 남들 신경 쓸 시간에 내가 재미있게 사는 법을 아주 열심히, 치열하게 궁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우울하고 짜증내며 살기엔 내 삶이 너무 아까우니까.


무서운 삼촌과 착한 형님이 각자의 문장으로 나를 혼내고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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