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댁은 잘살고 있을까?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은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그때는 좋았었잖아, 지금은 뭐가 또 달라졌지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브로콜리너마저, '유자차' 中)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을 밤마다 듣던 시절이 있었다. 거의 매일을 열광하며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아했던 프로그램이었다. 그중 매주 목요일에 하던 '낭만다방, 너 외롭지'는 전화 연결되는 청취자들의 기상천외한 캐릭터와 사연 때문에 기절할 정도로 웃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살짝 짠한 마음을 자아내기도 했던 마성의 상담 코너였다. 정말 수많은 사연들이 있었지만, 아직 내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아있는 건 '연남댁'이란 가명을 쓴 출연자의 목소리였다.
상담 내용은 서른한 살을 넘기기가 너무 힘들다는 고민이었다. 자기에게 헤어지자고 했던 남자가 다시 연락을 해 와서 자신을 너무 혼란스럽고 힘들게 한다는, 나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는데 그 남자는 그렇지 않다는 걸 다시 확인했음에도 미련이 남는다는... 어찌 보면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였음에도 그녀의 심정이 너무 애잔하게 전해졌다. 헤어지고 이제 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남자가 별 의미 없이 걸어온 전화에 다시 힘이 든다는 연남댁의 목소리는, 애써 덤덤하려 해도 많은 괴로움과 자조가 느껴져 방송을 듣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아니 그냥 그만할래요...
마냥 어리지 않은. 이런저런 일들을 꽤 겪었을법한 서른한 살의 여성이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지친 말투로 던진 저 말에 왜 그렇게 내 목이 메었을까. 그리고 이내 그녀가 노래 한 곡 하겠다며 살짝 울음이 섞인듯한 떨리는 목소리로 반주도 없이 부른 노래가 바로 브로콜리너마저의 '유자차'였다. 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넋두리하듯 부르던 그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너무 느껴져서, 노래를 다 듣고 난 후에도 여운이 한동안 남아있었다. 원래도 좋아하던 노래였지만, 이 노래를 사랑하게 된 데에는 연남댁의 지분이 정말 크다.
우리의 좋았던 기억이 설탕에 '켜켜이' 묻는다는 가사는 어떻게 쓸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저 노랫말을 정말 눈물겹게 만드는 계피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저민다. 커피도 아닌 유자차라는 소재에 추억을 이입시키면서 이토록 섬세하게 듣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건 참 놀랍고 부러운 감성이다. 표지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브로콜리너마저의 첫 앨범은, 나온 지 무려 17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 이제 계피의 목소리로 유자차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은 참 아쉽지만.
15년 전 '유자차'를 슬프게 부르던 연남댁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와 동년배일 그녀는 15년이 흐르는 동안 사연 속 나쁜 남자와는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으려나. 난 그 시간 동안 중독 수준이었던 커피를 줄이고 밤에 책상에 앉아 유자차를 타서 먹는, 건강을 염려하는 아저씨가 되었는데 말이다.
그저 라디오로 한번 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일 뿐인데도 그분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것은, 그날의 사연과 노래에서 느낀 마음앓이가 너무 진솔해서 마음에 깊이 박혔기 때문일게다. 연남댁이 어떤 사람인지 난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 살고 있으셨으면 좋겠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는 가사처럼 따뜻한 봄날과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으시길 바라며
https://youtu.be/qjzh3CwaYKc?si=OH4SiBMQZBH_38P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