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새끼 좀 물어가주세요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 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 같은 앞다리, 동아 같은 뒷발로 양 귀 찌어지고,
쇠낫 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래 정신없이 목을 움추리고 가만이 엎졌것다
(이날치, '범 내려온다' 中)
오늘은 매월 초 토요일 아침에 있는 주말 OB운동을 하는 날이었다. YB들의 요청으로 평소와 달리 간만에 학교에서 했던지라 살짝 먼 길을 운전해서 가야 했지만, 20명이 넘는 OB와 YB들이 어우러져 운동하는 시간은 역시나 좋았다. 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을 한 뒤 나른해진 몸으로 집으로 향하는데 평소라면 50분이면 갈 길이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을지로4가에서 시청역까지 꽉 막혀 도무지 앞으로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한껏 짜증을 내다가, 시청 광장에 다다라 목격한 것은 태극기를 손에 든 수많은 시위대들의 모습이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내란범을 풀어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헌법재판소를 모욕하고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피켓을 들고는 시위를 통제하는 경찰들에게 대거리를 하는 모습들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피곤했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장면은 할아버지가 손주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손에 헌법재판소를 욕하는 피켓을 한 손에 들게 하고는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자기 손주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들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내란수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최소한의 상식마저 짓밟으려 드는 것일까.
약 두 시간의 아침 운동에 한 시간 반 가량 운전을 하고 집에 오니 피곤이 몰려와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옆에서 와이프의 분노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와 잠이 깼다. 검찰이 내란범의 석방 지휘를 했다는 뉴스를 보며 화가 났다기 보단 그냥 더 피곤해졌다. 대체 이 나라는 어디까지 망가지고 사람들끼리 갈라지고 증오하며 피 터지게 싸워야 조금이나마 상식적인 방향으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왜 한 줌의 인간 말종들을 위해 이토록 많은 권력기관들이 최선을 다해 법과 규범을 어기면서 우리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침 어제 이날치의 '수궁가' LP가 도착했다. 그동안 정말 구하고 싶었지만 모두 품절이라 포기하고 있던 차에 향뮤직에 재고가 있는 걸 우연히 보고 망설임 없이 주문을 완료했더니 바로 '재고 없음'이 뜬 걸 보아 남은 한 장을 정말 운 좋게 구입한 셈이다.(심지어 초판이었다) 이번 주말은 이 앨범을 들으며 흥겹게 보낼 생각이었는데 저런 무도한 소식에 흥이 다 깨져버렸다. 그리고 화면을 통해 내란수괴가 집으로 향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생각이 났다.
이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호랑이를 볼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내려와서 노래 가사 속 모습처럼 주홍빛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어 쇠낫 같은 발톱으로 그 무도한 내란범 잡놈의 얼굴을 후려쳐주었으면 좋겠다. 자기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것도 모자라, 후안무치한 태도로 사람들을 조롱하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무뢰배에겐 호랑이에게 찢겨 죽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일지 모르겠다.
이날치의 이 전무후무한 명곡을 이런 주제에 끌어 쓰는 것이 참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노래하는 범이 으르렁거리며 내려와 인간 말종을 처단하는 상상을 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뒤집어진 속이 가라앉았다. 온스테이지에서 그들의 노래를 환상적으로 빛내준 앰비규어스 컴퍼니의 예술적인 춤사위 역시 선물 같은 흥겨움이었다. 이렇듯 좋은 노래는 특히 힘든 시간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닐까. 내일은 이날치의 음반을 들으며 물 먹은 솜처럼 축 쳐진 마음을 좀 일으켜봐야겠다.
https://youtu.be/SmTRaSg2fTQ?si=QEbDwkZxEwOQSFg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