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도 죽도를 쥐었다

바른(正) 생각이 마음(心)에 심어지길 바라며...

by radioholic

일과 취미를 망라한 어떤 분야든지 장비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다 같아 보이는 장비지만, 그 분야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선 브랜드나 재질, 모양의 세심한 차이에 따라 천차만별로 구분이 된다. 사실 그런 장비의 세계를 즐기는 맛에 취미를 하는 사람도 정말 많지 않은가. 내가 취미로 즐기고 있는 검도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검도는 기본적으로 호구라는 장비를 착용해야 하기에, 장비의 세계도 꽤나 다양한 편이다.


검도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호구에 대한 욕심이 없을 수 없지만, 흔히 검도의 소모품으로 생각되는 죽도 역시 개인의 호불호를 무척 많이 탄다. 손으로 쥐는 부위(병혁)의 굵기, 죽도의 무게 중심에 따라 유형이 구분되고(고도형, 동장형 등), 어느 정도 검력이란 것이 쌓이면 사람들은 자기에게 맞는 죽도를 찾아 헤맨다. 나 역시 꽤나 많은 죽도들을 써보다 지금은 '正心'이란 브랜드에 정착했다. 저 이름을 보고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두터운 병혁이 주는 묵직함이 든든해서 좋다. 죽도를 쥘 때마다 저 두 글자를 보면 뭔가 죽도의 이름과 같은 바른 마음을 갖기 위해 도를 닦는다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참 좋은 말이다. 正心...


새벽에 힘겹게 일어나 도장에 가서, 正心이란 두 글자가 옆에 새겨진 죽도를 손에 쥐고 기본 운동을 하고 호구를 입는다. 호흡을 끌어모아 연격을 한 뒤 바른 자세로 기본 타격을 하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대련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모든 과정이 날 단련시키기 위한 수양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문제는 도장에서 가졌던 그 正心이란 바른 마음이 도장 밖에서는 유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침 수련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내 모습은 결코 바른 마음을 유지하지 못한다. 운동 시간에 곧게 펴고자 노력했던 내 허리와 등은 사무실 의자 위에서 한없이 구부려지고, 죽도를 쥐며 마음에 품었던 바른 마음은 툭하면 짜증을 내고 한숨을 쉬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내 삐뚤어진 심보 앞에서 무색해지고 만다. 이런 내 모습 어디에서 正心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검도를 시작한 지 25년이 넘었지만, 난 어디 가서 검도를 통해 정신 수양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다. 여전히 나는 일상에서 수없이 흔들리며 감정을 폭발시키고, 평정심은커녕 이따금씩 툭툭 튀어나오는 독한 앙심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검도라는 운동이 그저 칼싸움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려면, 아침마다 죽도를 쥘 때 가지는 마음가짐을 일상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텐데 그게 영 쉽지 않다.


한없이 진지한 운동이지만 때로는 유쾌하게 ㅎ


지난번 학교 졸업생 운동을 하다가 잠시 쉬는 사이, 어린 OB 후배가 쥐고 있는 죽도 병혁에 저토록 엉뚱하고 재기 발랄한 문구가 쓰여진 걸 보며 웃음이 나와 냉큼 사진을 찍었다. 평소 밝은 성격답게 힘든 운동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방식인 것 같아 뭔가 흐뭇한 마음이 들었달까. 한없이 엄숙할 수도 있는 수련이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수련의 효과를 몸과 마음에 녹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 일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 게 아닐까. '正心'도 좋고 '슈퍼몽키어쌔씬'도 좋으니, 내가 하는 검도가 마음에 평안함을 가져올 수 있기를 바라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