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의 미학이 담긴 노래
내게 그런 핑곌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김건모, '핑계' 中)
나한테는 이상한 징크스 같은 게 있는데, 꼭 내가 휴가를 내는 날이면 인사 발표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 대한 인사이동 소식도 다른 직원들이 보내준 메시지를 통해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얼마 전 와이프의 생일에 휴가를 내고 영화를 보러 극장에 도착했을 때 카톡 메시지가 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보니 여지없는 인사 발표 소식이다. 월말에 인사가 있을 거란 소문은 있었지만, 결국 내 휴가에 맞춰 뜬 셈이다. 거참... 이런 것도 징크스라 할 수 있나 하는 마음에 피식 웃으며 인사 명단을 훑어보는데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내가 찾는 이름이 없다. 분명 이번 인사의 승진자 명단에 우리 팀원이 있어야 하는데 몇 번을 다시 봐도 그 이름 세 글자가 없다. 이번에 승진한 회사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를 건네며(이 친구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너무 고생을 했더랬다) 넌지시 우리 팀원 소식을 물어보니, 동기 역시도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인사팀에 문의를 해보니 인사 요건 중 채우지 못한 항목이 있음을 알려준다. 당사자인 팀원에게 확인해 보니 인사팀과 면담했을 당시엔 듣지 못했던 내용이란다. 왜 그걸 이제서야 알려주는 것일까. 혹시 임원부터 팀장까지 모두 득달같이 나서서 물어보니 마지못해 알려준 것일까.
물론 인사라는 것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승진자가 있으면 낙오자도 있는 법인걸 너무나 잘 안다. 다만 내가 이 팀원의 인사에 민감한 이유는, 그가 그동안 정말 말도 안 되는 인간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임에도 몇 년 동안이나 인사상 불이익을 당해온 걸 알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이란 인식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던 시기에 인격이 파탄 수준에 이른 관리자들에게 연이어 정신적인 학대 수준의 괴롭힘을 당했음에도, 그 관리자들은 무사히 퇴직을 했거나 잠깐 주춤한 뒤 승진을 한 반면, 이 직원은 단 한 번도 승진을 하지 못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윗사람에게 맞추지 못하고 마찰을 빚은 괘씸죄 때문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내가 지난번 인사에서 팀장 승진을 하고 지금의 부서에 왔을 때, 모든 사람이 나에게 물어보는 공통 질문이 바로 그 직원에 대한 것이었다. 그 친구 이러저러하다는데 괜찮냐는 질문들을 받으며 내가 느낀 것은, 그 이러저러하다는 내용 중에 약 70%는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되었다는 점이었다. 내가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딱히 믿으려 하지 않고 자기 팀원이니까 감싸주려 한다는 듯한 눈빛을 받을 때마다 사람들의 확증편향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일종의 공포마저 들었다.
수년 동안 불이익을 받고, 여기저기 하소연을 해도 딱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간을 견딘 그 직원을 온전히 이해하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직원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갈등의 과정에 귀책이 없지 않았고 그 문제들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충돌도 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다만 그 과정에서 그를 괴롭힌 자들에 비해 너무나 과중한 대가를 치르는 그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그리고 그 사람의 승진 누락을 능력 부족이나 조직 부적응이라며 낙인찍고, 그가 승진 경쟁에서 자신보다 잘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듯한 일부 젊은 직원들에 대한 환멸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대화도 나눠본 적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누군가를 낙오자 취급하고 은근한 무시를 서로 공유하는 것을 놀이처럼 즐기는 이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모두 본인이 조직에서 잘 나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고, 실제로도 꽤나 똘똘하고 윗사람들 비위도 잘 맞춰 인사 고과도 좋다는 것도. 하지만 반드시 다가올 현실은, 그들 중 누군가는 언젠가는 자기가 비웃던 그 낙오자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 모두가 다 같이 잘되기엔 승진의 문은 너무나 좁고, 결국 경쟁의 와중에서 밀려난 이들이 자신이 무시하던 그 낙오자가 되어 자신의 동료와 후배들의 멸시의 대상이 되는 장면은 그리 신기한 게 아니다. 그래서 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극 중 동훈(이선균)이 자신의 학교 후배이지만 직장 상사이자 상간남으로 횡포를 휘두르는 도준영(김영민)에게 던지는 이 대사를 참 좋아한다.
그러다가 자빠지면 쪽팔려 새끼야...
지금 누리고 있는 위치와 상황이 자기 인생 전체의 모습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인생은 길고 그 긴 여정에서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고꾸라지는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지금의 성공에 취해있는 자들은, 언젠가 좌절에 맞닥뜨렸을 때 더 크게 무너지곤 한다. 단 한 번도 자신이 낙오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겪어보지도 않았기에 실패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탓이다. 주변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그저 능력이 없기에 저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며 비웃는 사람들은, 언젠가 자기가 넘어졌을 때 손잡아 줄 사람이 없을 때의 그 절망감을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함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래서 난 김건모의 '핑계'란 노래가 참 좋다. 90년대 초 레게 열풍을 이끌며 김건모를 일약 슈퍼스타로 만들어 준 이 곡은 그저 듣기만 해도 흥이 넘치고 기분이 좋아지는데, 특히 첫 소절 가사에 담긴 내용은 짧고 단순하지만 무척이나 철학적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서 니가 나라면 넌 좋겠냐는 가사는 인생에서 역지사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흥겨운 사랑노래일 뿐일 수도 있는 이 노래를 들으며, 난 늘 저 첫 소절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흥얼흥얼 따라 부르게 되고 만다. 큰 사랑을 받는 노래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다음주가 되면 인사 발령 이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내하며 3월을 맞이해야겠지. 회사라는 조직이 가진 불합리함과 그 불합리함을 이용해 자기 입지를 지키려는 자들의 모습이 눈에 밟히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챙겨가며 덜 상처받고 버티는 방법을 익히며 살아갈 수밖에.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국 입장 바꿔 생각하는 연습을 통해 덜 오만해지고 조금 더 사려 깊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 아닐까. 이번 주말에는 김건모의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에 걸어놓고 들으며 꿀꿀한 기분을 좀 달래 봐야겠다. 물론 플레이리스트의 1번은 당연히 '핑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