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하찮은 존재로 전락해버릴...
우리를 위해 만든 많은 것이 이젠 우릴 비웃으며
혹시나 이젠 너무 늦었을까 불안하게 만들고 있네
인간은 인간이다 우리에겐 기다림도 필요한걸
기쁨도 슬픔들도 우리에겐 무엇보다 소중한걸
(015B, '인간은 인간이다' 中)
부서 업무와 관련해서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언론사에 뿌릴 보도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대강의 내용을 서둘러 작성하고 초안을 부장님에게 보고하니, 내용은 괜찮은데 뭔가 좀 허전하니 인포그래픽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사실 나도 글로만 채워진 자료가 마음에 걸려서 사진 자료라도 넣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이었기에 어떤 인포그래픽을 넣어야 할지 생각하려는 와중에 부장님이 한 팀원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보도자료 텍스트 따서 챗GPT에 넣고 인포그래픽 한번 만들라고 해봐
지시가 내려진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아주 그럴듯한 인포그래픽이 스토리 라인까지 짜져서 팀원의 모니터에 떠있다. 내용을 본 뒤 부서원들끼리 만족스러운 박수를 치며, 이거 조금만 다듬어서 자료에 넣자는 결론과 함께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자리로 돌아와 앉는데 묘한 감정이 들었다. 우리 입장에서야 누군가에게 별도로 의뢰하지 않고 과제 하나를 챗GPT로 뚝딱 해결했지만, 어쩌면 그 과제가 누군가에겐 하나의 일감이었을지 모르니까. 사람의 자리를 AI가 대체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람이 만들어낸 존재가 종국엔 사람을 지배할 것이라는 공포는 어느 시대에든 존재하였으면 수많은 아포칼립스물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터미네이터' 속 인조인간이나, '혹성탈출'에서 인간의 생체실험의 결과로 인간을 능가해 버린 유인원들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으로 인간을 위협하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현재 인간이 마주하고 있는 AI의 위협은 눈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그 실체를 알 수 없어 더욱 무섭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이미 인간의 인지능력을 초월한 AI는 아주 자연스럽고 거부감 없이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지만, 그 와중에 데이터를 수집하고 능력을 배가시키며 인간의 영역을 잠식해가고 있다.
이제는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망설임 없이 챗GPT나 제미나이에 질문을 해서 답을 얻어낸다. 조금의 기다림이나 망설임도 참지 못하게 된 인간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AI에 의존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자양분 삼아 데이터를 증강시키는 AI의 학습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절대 사람이 기계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바둑에서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패배할 때 느꼈던 인간들의 절망감은, 어느덧 퇴색되어 이젠 사람이 AI를 이길 수 있는 영역은 없을 것이란 체념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난 그게 너무나 두렵다.
거대해진 지능망은 이젠 더 이상
아무도 통제할 수 없게 돼버렸고
우리들의 아이들은 거르지 않은
그럴싸한 대답 앞에 놓여져 있네
(015B, '인간은 인간이다' 中)
무려 30년 전에 발매된 015B 6집에 수록된 '인간은 인간이다'는 이미 이런 미래가 도래할 줄 알았다는 듯, 현재 우리가 겪는 모습들을 예언처럼 노래한다. 아직 인터넷은커녕 PC통신도 전화선과 모뎀을 통해 힘겹게 즐겨야 했던 그 시절에, 마치 지금의 AI와 우리의 관계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저 통찰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특히 우리 아이들이 거르지 않은 그럴싸한 대답 앞에 놓여 있다는 가사를 들으며, 요즘처럼 챗GPT나 제미나이가 우리에게 허위 답변까지 서슴지 않는 장면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AI에게 전쟁을 맡기면 망설임없이 핵 공격을 선택할 것이라는 최근의 시뮬레이션 결과는 통제되지 않은 기술이 실제로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던가. 어쩌면 지금의 모습은 예고되었던 미래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난 사실 015B의 6집을 1~6집까지의 앨범 중 딱히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6집 이후의 앨범은 언급하지 않겠다) 너무 염세적이고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가 깔려 있어 듣고 나면 영혼을 살짝 좀먹는듯한 기분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년이 지나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며 이 앨범 전반에 흐르는 그 어두움은 어쩌면 인간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그 자리를 AI와 같은 존재에게 빼앗긴 뒤 감내해야 할 암울한 미래의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인간의 영역을 지금의 AI나 그 이후에 또 나올지 모를 정체 모를 것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깊은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짧은 노래 제목이 던져주는 화두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점이 온 것 같다.
https://youtu.be/WhBHEghmLVY?si=QbPICm3O_0endR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