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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Apr 28. 2024

바지락술찜 같은 사이

무리할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에 대하여...

작년 어느 날 금요일 밤... 내 거의 유일한 중학교 친구인 J에게서 연락이 왔다. 회사 업무로 술을 꽤 세게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우리 집 쪽을 지나게 되어 연락했다기에 주섬주섬 옷을 입고 집 근처 포차로 갔다. 너무 기름진 걸 많이 먹어서 뭔가 속을 풀만한 안주를 먹고 싶다는 말에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다가 주문을 했다.


사장님, 바지락술찜 하나랑 소주 하나요


나 역시 저녁을 먹어 배가 차 있었는데도, 그날 둘이 먹었던 바지락술찜은 어쩜 그리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평소랑 다르게 한껏 지친 표정으로 바지락 국물을 후르륵 먹는 친구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야... 너도 먹기 살기 어지간히 빡세구나' 라는 동질감이 맛을 북돋았던 걸까. 회사 다니는 40대 남자들이 으레 할법한 그런 먹고사니즘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둘이서 바지락술찜 한 냄비와 소주 한 병 반을 먹고 자리를 털었다. 평소 같으면 자주 가는 LP바에서 맥주나 한 잔 더 하자고 했을 테지만, 그날은 그렇게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약 30년을 만나다 보니 서로의 상태 정도는 무심결에도 알게 되니까. 그때부터 종종 다른 자리에서 2차를 가면 바지락술찜을 시키곤 한다. 기름진 짭짤한 국물에 바지락 한 점을 먹으면 1차에서 몸에 스며든 술기운이 가시는 느낌이 좋아서였다.


어제 요리학원에서 배운 바지락술찜의 조리법은 너무 간단하고 쉬워서 놀라웠다. 바지락을 바락바락 씻어 해감하고, 각종 야채를 볶은 기름에 바지락과 청주를 부어 끓여내면 그걸로 끝. 그렇게 술찜을 좋아한다면서 이 간단한 조리법도 모르고 식당에서 사 먹기만 했단 말인가. 새삼스레 나이를 헛먹었다는 허탈함이 들었다. 하긴... 나이를 헛먹은게 어제오늘 일인가.


언제부턴가 슬금슬금 내 소울푸드가 되어버린...


술찜을 하며 인상 깊었던 건 따로 소금 간을 하지 않았는데도 간이 딱 맞았다는 것이다. 소금을 안 넣어도 되냐는 내 질문에 바지락이 가진 짠맛만으로도 충분히 간이 된다는 선생님의 답변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와닿았다. 인위적인 방법을 쓰지 않아도, 재료 본연의 맛으로도 이런 맛있는 음식이 가능하구나. 어찌 보면 별거 아닌 사실인데 그게 유난히 크게 다가온 건, 요즘 들어 '자연스러움' 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40대 중반에 접어들며 느끼게 된 건 인간관계가 갈수록 버겁다는 것이었다. 점점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는 거야 아주 당연한 현상이지만, 무리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가 되는 관계가 점점 적어지는 것은 꽤나 울적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만나면 무언가를 따지게 되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가늠한 뒤에 응대를 해야 하는 그런 관계에 피곤함을 느끼게 되면서 인간관계의 폭은 놀랍도록 줄어들었다. 언제부턴가 나에게서 받을게 딱히 없음을 알게 된 이들이 주춤주춤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관계라는 게 얼마나 허울만 좋고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것인지. 그런 관계들이 정리된 후 남은, 어느 때 연락이 와도 유쾌하고 부담 없이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한 이들이 너무나 소중함을 알게 된 건 어찌 보면 외로움이 내게 준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조미료가 없어도, 그저 바지락이 제 몸에 머금고 있을 뿐이었던 염분 만으로도 좋은 맛을 내주는 술찜처럼, 그냥 서로 가진 것 그대로가 용납이 되고 그런 모습을 오래 알아갈수록 깊어지는 것이 좋은 인간관계가 아닐까. 관계 안에 무리한 조건을 첨가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만남은 시간이 갈수록 소중해진다. 어제 검도부 OB 운동 모임을 다녀와서 마음이 좋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낸 새로울 것 없는 사람들끼리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아침에 모여, 운동하고 국밥 먹고 커피 마시며 요즘 사는 얘기로 수다 떠는 약 세 시간의 만남이 내게 주는 편안함이 너무 좋았으니까.


점점 늘어나는 오롯이 홀로 있는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이렇게 요리라는 걸 배우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게 어찌 보면 행운이 아닐까. 조리시간이 30분도 채 안 되는 술찜을 만들며 이렇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요즘 바지락이 제철이라는데 조만간 복습도 할 겸 집에서 바지락술찜에 와인 한 잔을 곁들여봐야지. 아! 술찜에 파스타면을 삶아 넣으면 봉골레파스타가 된다고 하니 그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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