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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Jun 08. 2024

메밀소바야 미안해...

누구나 한 번은 겪는 바보 같은 순간

고백하건대 난 꽤나 중증의 면중독자다. 한때 유행했던 '면식수행'이란 신조어는 정말 날 위해 있는 말인 줄 알았다. 술에 취해 들어와서 끓여 먹는 라면만한 진수성찬은 없고, 회사에서 점심 뭐 먹을지 고민할 때의 치트키는 부대찌개 아니면 김치찌개+라면사리 조합이었으니까.(둘은 엄연히 다르다) 밀가루와 탄수화물이 몸에 그리 좋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하게 아려오지만... 어쩔 수 있는가. 먹고 싶은 거 못 먹는 스트레스가 밀가루+탄수화물 조합보다 더 해롭다는 마음으로 버티는 수밖에.


이런 내게 힘겨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은혜로운 존재는 바로 메밀소바와 콩국수다. 여름이면 맥을 못 추고 허덕이는 내 등짝을 후려치며 기운 내라고 혼쭐을 내주는 자양강장 음식이랄까. 여름의 뜨거운 공기 속에서 차가운 면이 내 입과 식도, 뱃속을 차갑게 식혀주는 그 쾌감을 잊지 못해 여름이면 일주일에 한 번은 메밀소바나 콩국수를 먹는다. 요리학원에서 메밀소바 원데이클래스가 열린다는 공지에 망설임 따위 없이 신청을 하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수업시간을 기다렸다.(일을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늘 그랬듯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실습에 들어갔다. 쯔유를 만드는 레시피가 생각보다 너무 간단해서 '오늘은 아주 무난하겠는걸'이란 마음으로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멸치를 살짝 볶고, 다시마와 가쓰오부시 그리고 선생님이 구워주신 대파까지 넣은 육수의 향은 정말 일식집에서 맡는 그런 냄새였다. 왠지 모를 흐뭇한 마음으로 이제 육수를 면포에 거르기만 하면 되는데... 내 생각과 달리 내 손은 면포 없는 체에 육수를 통째로 쏟아서 버리고 있었다. 기껏 만든 육수를 싱크대에 쏟아버리는 내 손을 눈으로 보면서 생각했다.


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내가 하고 있는 게 바보 같은 짓인걸 알면서도 계속하고 있을 때가. 사내 메신저로 상사 욕을 하고 엔터를 누르는데 메신저 상대가 그 상사인걸 확인했을 때가 이런 기분일까. 내 눈과 머리는 이게 아니라고 하는데 결국 내 손은 육수를 몽땅 버렸고, 체에는 멸치와 가쓰오부시, 구운 대파의 잔해가 처참하게 남아있었다. 황망한 마음으로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니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다시 재료를 준비해 주신다. 조리사 자격증 시험장에서도 자주 나오는 실수라면서. 그래... 이연복 셰프도 옛날엔 육수 같은 거 막 버리고 혼구녕이 나고 그랬을꺼야.


간단한데도 손이 살짝 많이 간다 ㅎ


황급히 다시 육수를 끓이고(버리지 않고), 간장과 설탕, 청주, 맛술을 넣고 맛을 보니 어라? 정말 제법 그럴듯한 쯔유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무를 갈아 넣으니 정말 이자카야에서 먹던 그 쯔유 맛이다. 그랬구나...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그래서 전주까지 가서도 소바맛집을 찾아가면서까지 먹던 메밀소바를 나도 할 수 있는 거였구나 생각하니 다소 허탈하기도 했다. 왜 진작 해볼 생각을 못했을까.




이런저런 실수를 하면서 또 하나를 배운다. 배우지 않았으면 느껴볼 수 없는 즐거움이다. 집에서 다시 해보니 좀 더 나아진 것 같아 더 그랬던 것 같다. 5월은 이런저런 일로 다소 정신없이 지나가서 요리학원에 거의 가질 못했지만 이제 다시 시간을 좀 비우고 가봐야겠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신기한 경험은 늘 생활에 자극이 되니까. 이번 여름은 내손내만 메밀소바로 버틸 준비를 해봐야지.


소바야~ 미안해. 다음부턴 온전한 육수로 만들어줄께^^


집에서 다시 만들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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