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라는 식재료는 평생 먹지 않을 줄 알았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채소의 색이란 모름지기 초록, 주황, 빨강 등 기본적인 색채를 띠고 있어야 하거늘, 바이올렛빛 채소라니. '가지는 형광보라색이라 먹을 수 없다'고 했던 유희열 님의 말이 딱 내 심정이었다. 게다가 아삭하지도 않고 물컹물컹한 식감이라니. 엄마가 해주셨던 반찬에서 가지는 늘 저만치 밀려나는 신세였고, 엄마의 호통에 마지못해 한두 젓가락 먹는 시늉만 하고 냉큼 냉장고에 넣어버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영롱한 보랏빛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가지반찬을 먹고 있었다. 물컹물컹하다고 느꼈던 식감은 사실은 부드러운 것이었고, 특유의 형광보라색은 음... 양념을 하면 눈에 잘 띄지 않으니까ㅎ 도통 무슨 맛인지 모르겠던 가지의 무미(無味)함은 어떤 양념에도 자연스레 녹아든다는 장점이 있더라. 혼자서는 빛이 나지 않지만, 다른 재료들과 어우러지면 상당한 시너지를 내는 게가지라는 식재료의 매력임을 느끼게 되었다. 때마침 학원에서 소고기가지덮밥 수업이 있길래 기꺼이 신청한 것도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덮밥류의 장점은 그럴듯한 비주얼에 비해 만들기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 전에도 말했지만 재료 준비만 한다면 조리 과정은 상당히 심플해서 좋다. 학원에선 부채살을 썼지만 마트에 가보니 채끝살 할인 행사 중이길래 채끝살을 샀고, 꽈리고추 한 봉지를 사면 2/3은 버릴게 뻔해서 집에 있던 청양고추를 썼다. 실파와 쪽파가 있으면 좋겠지만 얼마 전 실파 한단을 샀다가 요리 한 번 하고 죄다 버린 아픈 기억이 있어서 냉장고에 있는 대파를 꺼냈다. 이렇게 대체 재료를 써도 그럴듯한 맛이 난다는 게 요리의 묘미 아닐까.
아직은 손이 느려 간단한 재료 준비에도 시간이 살짝 걸리지만,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다. 이 날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어떤 맛을 낼까를 생각하는 시간은 뭐랄까... 기타 코드를 하나하나 배우면서 그 코드들이 하나의 곡을 완성해 나갈 때의 쾌감과 상당히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그 각각의 재료에도 각각 다뤄야 하는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루할 틈이 없더라. 가지를 썰고 소금을 살짝 뿌려 물기를 빼내고, 거기에 전분을 뿌려 소스 농도를 조절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요리 초보에겐 그저 신세계다.
재료들이 어우러져 요리가 된다
언제나 느끼지만 학원에서 선생님이 옆에서 세심하게 봐줄 때와 집에서 혼자 할 때의 결과물은 늘 다르다. 이번에도 집에서 혼자 해보니 간이 조금 셌고, 전분이 많이 들어가서인지 소스가 조금 꾸덕해졌던 것 같다. 좀 더 맛을 내고 싶은 욕심에 굴소스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고기와 가지의 콜라보는 좋은 맛을 내주었고, 주말 저녁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가지를 다듬고 요리를 하면서 문득 '아... 나 이제 정말 어른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무려 마흔네살 아저씨가 새삼스럽게 말이다. 어릴 적엔 싫고 피해 다녔던 것들이 문득 좋아지고, 그러면서 즐길거리가 많아진다는 것이 나이듦의 순기능이 아닐까. 여전히 난 생굴을 못 먹고 싫어하지만 또 언젠가는 이 좋은 걸 왜 안 먹었냐며 날 책망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요즘 이런저런 일들에 분주해서 요리를 좀 소홀히 했지만 이제 다시 복습도 하고 새로운 요리에 도전도 해봐야겠다. 아무튼...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