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페에서 책을 읽는 이유

「그래도 나는 서울이 좋다(by 오영욱)」를 다시 읽다

by radioholic
내 친구들을 비롯한 많은 강남의 30대들에게 부탁할 말이 있다. 홍대 앞의 어린 여자애들은 자기네 또래끼리 잘 놀라고 하고, 우리는 조금 이른 시간에 그곳에 찾아가 공들여서 만들어놓은 예쁜 카페들에 가서 비싼 메뉴 하나씩을 먹고 와줬으면 좋겠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은 클럽이 아니라 비싸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채 가게를 접을까 말까 고민하는 작은 점포의 주인들이기 때문이다.(92p)


아마 내가 지금도 스타벅스나 커피빈 같은 대형 카페보다 조그만 동네 카페에서 시간 보내기를 즐기게 된 이유 중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오기사가 쓴 저 문장들 때문이다. 괜히 나이 먹고 홍대를 어슬렁거리면서 어린 여자애들이랑 술 먹을 생각하지 말고, 그럴 돈이 있으면 작은 카페에 가서 힘들게 영업하는 사장님들에게 힘이 되어주라는 저 내용이 가슴에 깊게 박혔기 때문이다. 물론 난 강남의 30대는 아니었지만.


나만의 아지트가 되는 카페를 만들어가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도 없다. 그곳에서 이것저것 시켜 먹으며 책도 읽고 노래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한량의 삶이랄까. 사장님과 안면도 익히며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그 카페가 유지되는데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알량한 흐뭇함도 느끼는 건 덤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만의 아지트가 되면 결국 그곳이 살아남기 어렵고, 유명해져서 손님이 많아지면 나만의 아지트가 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존재한다는 것. 슬픈 건... 대부분은 전자의 경우였고, 내가 사랑했던 수많은 카페들은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없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물렀던 합정 후마니타스 책다방. 이제 다신 볼 수 없는 그곳.


단골카페에 틈틈이 들러서 한두 시간 남짓 무언가를 읽고 정리하는 시간은 정말 소중하다. 그렇게 카페에 앉아 짬짬이 읽었던 책들이 돌이켜보니 꽤 많이 쌓여있었고, 그 책들의 내용과 문장들은 알게 모르게 내게 꽤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 당시에 카페에 앉아 오기사의 책을 펼쳤기 때문일 테고. 요즘 논란이 되는 카공족처럼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하루종일 자리를 점유하며 영업에 방해를 초래해서는 안 되겠지만.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조그만 카페 한 군데는 마련해 두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 믿는다. 물론 사장님에게 도움이 되는 선에서ㅎ




내가 이 책을 다시 꺼내 들고 놀랐던 건, 이 책을 읽은 지가 벌써 12년이나 지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오기사라는 멋진 작가 겸 건축가를 알게 되었던 계기가 바로 이 책 때문이었는데, 건축이라는 분야를 귀여우면서도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알기 쉽게 전달해 줄 수 있을까 감탄했던 게 10년이 더 되었다는 게 믿기지를 않아서. 다시 태어난다면 그땐 내 뇌에 수리능력과 공학적 감각을 탑재하여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것도, 건축이나 공간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게 만든 것도 모두 오기사의 영향이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물들에 담긴 다양한 의미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해 준 참 고마운 작가다. 요즘은 좀 뜸한 것 같지만... 그가 저술 활동을 다시 해주면 언제든지 사서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즐거움은 어떤 것일까(294p 그림 발췌)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카페에서 읽은 책들을 조금씩 정리해 봐야겠다. 책도, 카페도...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기억을 담은 매개체가 되어줄 테니까. 오기사의 이 책을 다시 읽으며, 12년 전 내 모습을 새삼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https://youtu.be/hpD6L7f-fC8?si=K-I7hI8k7yLDcTuD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