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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닭비둘 Sep 19. 2023

내 손바닥은 터졌다.

내 손바닥은 터졌다. 따지고 보면 큰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고사리같은 손을 무지막지한 PVC파이프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음악을 맡았던 담임선생님은 중학생 ‘씩’이나 된 애들에게 매일 일기를 쓰게 했다.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딱히 게임 말고는 할 것도 없었다. 3개의 게임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목요일에는 도저히 쓸 게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짧게 썼다. “아. 이런 날도 가끔은 있어야 하는 법. 오늘은 일기가 쓰기 싫다.”     


매타작을 해대던 선생님은 10년 후를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가까이 하라는 고도의 교육법일지도 모른다. 고로 스마트폰의 시대다. 카카오톡부터, SNS의 글귀와 뉴스기사까지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하루에도 수백 건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간은 대체로 정해져있다. 수업시간이나, 밥 먹기 직전, 지하철, 화장실 등. 대체로 소위 ‘자투리 시간’이다. 짧은 시간에 다량의 정보를 읽어내는 것에 눈은 익숙해져간다. 눈이 익숙해지자 뇌도 익숙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속독의 올가미’에 갇혀버렸다.     


침대에 누웠다. 잠은 안 온다. 역시나 스마트폰을 열어 인스타에 접속한다. 몇 분 사이 타임라인은 차올랐고 훔쳐봐야 할 타인의 일기는 산더미다. 음식 짤부터, 어딘가에서 퍼온 동영상 캡쳐 사진. 연애자랑, 개그, 드립 온갖 텍스트의 향연이다. 이윽고 지인의 장문 글에 다다른다. 언론탄압에 분노했다나 뭐라나. 길다. 이미 네이버 뉴스에서 대충 내용은 봤다. 더 읽으려면 ‘더 보기’를 누르란다. 시간이 없다. Skip     

빨리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은 현대인에게 ‘긴글포비아’를 낳았다. 공포는 잠재된 강박으로부터 창출된다. 나와 이질적인 사람들이 내가 누리는 지위를 무너트릴까봐 생겨난 것이 ‘제노포비아’다. 신성한 남녀의 결합의 공식을 무너트릴까봐 나타난 게 ‘호모포비아’다. 긴글포비아에 물든 현대인은 짧은 글만 찾는다. 뉴스는 헤드라인과 리드문 정도만 보면 된다. 긴 글은 두렵다. 두려움을 마주한 순간 가장 쉬운 방법은 ‘무시’라고 했던가? 누군가의 장문은 선동이나 허세글로 지레짐작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단편적인 짧은 글만을 좆게 된다.     


햄, 치즈, 빵, 올리브를 한 번에 씹어 먹는다고 그게 피자가 될 수는 없듯, 단편적 지식의 파편들은 실체를 만들지 못한다. 여기저기서 떠다니는 정보의 조각들을 보며 사람들은 나름대로 사실을 재단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정의한다. 마치 그것이 진실인 양 신념하고 타인에게 퍼 나른다. 끝은 처참했다. 알 수 없는 음모로 들끓었고, 각자의 정의에 파묻혀 서로를 헐뜯었다. 보수와 진보, 상식과 비상식. 어쩌면 항간에 떠도는 대결구도는 사실 미완성과 미완성의 싸움이었다.     


일기를 짧게 썼다고 매질을 해대는 선생님은 더 이상 없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책임져야 할 성인이 된 탓이다. 합리적인 판단은 사실관계를 파악한 이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실관계는 단편적 정보습득이 아닌 종합적 인지로부터 파악된다. 이렇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공포를 이기는 가장 어려운 방법은 ‘직시’다. 그러나 그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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