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진혁 Sep 29. 2021

백현진과 패턴

패턴 같아서

음악 하고 그림 그리고 연기하는 백현진에게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의 앨범 <Csimplex 04>를 듣고 든 의문.



《Csimplex 04》Cover

패턴의 미묘함

영원히 마감의 굴레에 속박 당하는 게 아닐까. 새벽에 원고를 쓰다가 생각했다. 더는 못 쓰겠어서 든 생각이기도 하다. 월간지는 마감을 매월 중순 즈음 한다. 마감 일정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하루이틀 정도일 뿐. 큰 틀에서 보면 반복적이고 이건 일종의 패턴이다. 주 단위의 업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첫 주에 하는 일과 둘째 주에 하는 업무가 지난달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깊이 보면 다르다. 기사의 주제가 다르고, 이미지가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원고의 내용도 다르고, 몸무게도 다르고. 먹는 주전부리는 비슷하지만 뱉어내는 글은 다르다. 그래도 게으른 본성은 변하지 않고, 산만한 습성도 여전하다. 본질은 같고, 행동은 반복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회사 일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싶다.

집중이 안 돼서 음악을 들었다. 백현진의 새 앨범 <Csimplex 04>였다. 백현진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었기에 그의 새 앨범을 들어야만 했다. 사실 더 일찍 들었어야 했는데 글이 안 써질 때 들으려고 아껴뒀다. 전작인 <가볍고 수많은>의 몇몇 곡들, 특히 ‘빛’을 들었을 때는 한동안 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영감을 기대하며 <Csimplex 04>를 재생했는데, 반복적인 전자음만 텅 빈 사무실을 두들겼다. 백현진은 노래하지 않았다. 이따금 허밍을 했고, 대부분의 트랙은 반복적인 전자음으로 채웠다. 곡마다 전자음이 다르고, 멜로디도 다르지만 비슷한 소리가 반복되는 양상은 같았다. <Csimplex 04>의 곡은 나와 같은 처지의 회사원 같았고, 회사원이 앉아 있는 사무실 같았다. 트랙마다 다른 구조의 사무실이 연상됐다면 이상한 걸까? 백현진에게 물었다. “혼자서 소리를 만들고 후반 믹스했는데, 믹스 과정에서 공간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런데 믹싱 엔지니어들이 생각하는 공간이 각기 달라요. 제가 생각하는 공간을 <Csimplex 04>를 통해 소리로 구현했죠.”

가사 대신 허밍만 남긴 건 왜일까. “가사 없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백현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심플렉스 시리즈는 당분간 계속 발표할 거예요. 연주, 녹음, 믹스까지 혼자서 해내고 가사가 없는 곡을 만드는 게 원칙이에요.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 중 언어에 예민한 사람들이 제 음악의 가사에 흥미를 느낀다는 걸 활동하며 알았어요. 그런데 <Csimplex 04>는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니어도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허밍이에요. 목소리는 있되 가사가 없는 음악을 오래전부터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과거 백현진이 쓴 노랫말은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음악 없이 읽는 것만으로도 멜로디가 생겼다. 음악과 분리되어도 유의미한 가사였다.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음악으로부터 독립시켜도 버틸 수 있는 가사를 쓰고 싶었어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10년 전부터 목소리는 있되 가사가 없는 곡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워낙 흥얼거리는 걸 좋아해요. 가사를 쓰기 전부터 흥얼거리면서 멜로디를 만들어요. 이번 <Csimplex 04>의 곡들 외에도 사실은 멜로디를 먼저 만든 곡들이 많아요. 리듬을 만든 후 멜로디를 걷어낸 경우도 있고, 곡이 완성되는 과정은 천차만별이고 뒤죽박죽이라 일정한 패턴이 없어요.”


작업 과정에 패턴이 없다는 말은 의외였다. <Csimplex 04> 트랙들의 반복적인 전자음이나, 지난해 백현진의 개인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 Work Song: Soil, Mattress and Waves>에서 정사각형 리넨에 그린 ‘패턴 같은 패턴’ 작품들에서 패턴이 읽혔으니까. 당연히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패턴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곡을 만드는 과정에 패턴이 없는 것이지 곡 자체는 패턴이 굉장히 뚜렷하죠. <Csimplex 04>는 지난 개인전에서 선보인 ‘패턴 같은 패턴’ 느낌일 거예요. 얼핏 들으면 ‘복사 붙이기’한 것 같지만 사실은 미묘한 차이들이 계속 발생해요.” 백현진은 ‘뽁뽁이(에어캡)’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뽁뽁이는 제조 당시에는 비닐 안에 공기를 머금은 일정한 형태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람이 빠져 쪼그라들거나, 흠집이 생기거나 조금씩 변해요. 멀리서 보면 패턴 같지만 사실은 전부 다르죠. 제 음악은 그런 요소가 꽤 있어요.” 멀리서 보면 패턴으로 읽히지만 가까이 가면 각자의 세계가 관찰된다. 백현진 작업실 창에 붙은 ‘뽁뽁이’에도, 매일 보는 용산역 앞 출근 풍경도 자세히 보면 다르다. 그걸 알려면 지켜봐야 한다. 멍하니. 그런 맥락에서 백현진은 ‘불멍’ ‘물멍’의 선구자란 생각이 들었다. “멍 때리는 걸 좋아해요. 물방울이 일정하게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아하고 흥미가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하는 음악이 아주 실험적이라 말할 수는 없어요. 저는 철저하게 팝 문법 안에서 음악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양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가 안 돼서 그렇지 음악가로서는 팝 음악의 어법을 지키며 일하고, 그 안에서 제가 듣고 싶은 것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대중성을 갖는 게 재능이라 치면 저는 그런 재능이 없는 사람이에요. 관심도 별로 없고요. 또 아무리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들어도 때로는 다른 갈증이 있어요. 성에 안 차서 직접 만들어 듣는 것 같아요.”


<Csimplex 04>의 04는 본래 이 앨범이 4편의 시리즈로 계획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백현진은 홀로 50여 곡을 만들었고, 그중 40곡을 추렸다. 그는 40분짜리 LP 기준 네 장 분량의 음악을 확보하여 심플렉스 1, 2, 3, 4를 발매할 계획을 세웠다. 최근작인 9월, 10월에 작업한 13곡을 먼저 공개하면 심플렉스 3, 2, 1을 역순으로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지 않더라도 04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괜찮겠다는 판단이었다. 네 장의 LP를 기획한 건 박스 세트를 염두에 둔 게 아니었을까? “박스 세트를 잠깐 생각하다 말았어요. 어쨌든 그냥 이가 빠진 것처럼 제목이 나가는 게 괜찮을 것 같아요.”


그냥 나오는 거

‘패턴 같은 패턴’에선 백현진의 시간을 보았다. 그 시간은 리넨 위에 작가의 손끝에서 ‘그냥’ 나오는 패턴 같은 패턴을 그리고 있는 작가의 흔적이요 허물 같은 것이다. 그 인상은 <Csimplex 04>에서도 이어졌다. 미세한 차이가 있는 전자음들을 패턴처럼 모으는 작곡가의 시간을 듣는 경험이었다. 백현진이 시간을 모으는 사람처럼 보였다. “회화에서 시간성에 대한 얘기는 많이 나오지만 저는 별로 할 말이 없어요. 시간성은 제가 주목하는 낱말이 아니에요. 요즘은 소리 자체에 집중해요. 신시사이저와 같은 기계를 이용해 소리를 이렇게 저렇게 합성하다 보면 여러 이유로 그 소리가 좋아질 때가 있어요. 우리는 진동에 의해 소리를 경험하는데 가청주파수 중 저음과 고음은 훨씬 더 물리적으로 감각되거든요. 그 외에도 ‘삐’ 하는 간단한 단음이 제 이상한 기억을 건들기도 해요. 그건 감정적인 이유고. 이것저것 조합하며 머리로 이해하는 재미도 있어요. <Csimplex 04>는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소리에 재미를 느끼고, 소리 만드는 일에 완전히 빠져 만든 앨범이에요.”

백현진은 오전에 소리를 만졌다. 그러다 뭔가 생각나면 위층에 올라가 그림을 그렸고. 오전에 소리를 다루는 일과는 몇 달간 지속된 패턴이었다. 그때 곡들이 줄줄이 쏟아졌다고 한다. 백현진은 말하는 중 ‘패턴’을 습관처럼 언급했다. “패턴이 안 되는 패턴을 만들겠다는 말장난 같은 망상을 하면서 시작된 것 같아요. 일하다 보면 패턴이라는 낱말이 자꾸 언급되는데, 그것도 그냥 패턴인 것 같은데요?”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걸 못 견디는 사람으로서 오래 집중하는 비결이 궁금했다.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저는 돼요. 일단 시작하면 다른 생각이 안 들고 집중해서 작업해요. 몇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요. 그만이라는 신호가 올 때까지 해요. 그 신호는 언제 올지 몰라요. 일을 시작하면 아무 생각 없어져요. 붓질할 때는 계속하게 되고, 소리 다룰 때는 계속 소리를 다루죠. 근데 무아 상태로 너무 오래 하면 몸이 상할 때가 있어요. 몇 날 며칠 음악 디깅하다가 허리 나간 적도 있어요, 진짜.”


빌런 연기

백현진 같은 상무 만나기 무섭다. 백현진을 보러 갈 때부터 말하고 싶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백현진은 회장 아들 오태영 상무를 연기했는데, 많은 네티즌들이 ‘연기 천재’라는 댓글을 달았다. 백현진이 연기 천재인지는 아직 두고 봐야겠지만, 백현진이 연기한 상무는 무서우리만큼 실감났다. 과하지 않고, 현실적이게 얄미워서다. 드라마에서 못된 임원들이 쏟아지는 시대에 백현진은 새로운 빌런 임원의 아이콘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나저나 백현진은 직장인이 아닌데 어떻게 상무를 그리 잘 표현했을까? “촬영 전부터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재용 씨 사진을 휴대폰에 넣고 계속 보고 다녔어요. 누가 보면 제가 이재용 씨를 굉장히 흠모하나 보다 할 정도로 갖고 다니며 봤어요.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긴 했어요. 험한 일 하는 분들도 많이 뵀고요. 그래서 역할 제안을 받으면 제가 만난 분들이 떠올라요. 거기까지예요. 연기할 때는 제가 느끼는 감정과 정서 그 이상의 레퍼런스를 쓰진 않아요. 저는 제 몸뚱이를 갖고 연기하니까요.”

연기자 백현진의 경력은 꽤 길다. 회사로 치면 상무급 연차다. 백현진은 2000년 초반부터 연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배우가 본업은 아닌지라 연기한 물리적 시간을 모으면 아주 길진 않다. 한 해 영화 한두 편, 드라마 한 편을 소화한 건 최근의 일이다. 그림 그리고, 음악 만들고, 공연도 하는 백현진이라 연기에 시간을 많이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백현진이라는 상무 빌런을 기다리는 네티즌에게는 희소식이다. 올해 백현진은 연기를 조금 더 해볼 심산이다. 벌써 드라마 두 편의 빌런 역을 꿰찼다. 그런데 드라마 촬영하면서 음악과 미술 작업 병행이 가능할까? 주연급 조연이 매니저도 없이? “드라마를 매니저 없이 혼자 한다는 소리를 하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해요. 전에는 할 만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요. 연예기획사에서 연락이 오면 손사래 쳤는데, 아무래도 회사와 일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대본 외우기도 전에 일정 체크하다가 정신이 빠져요.”


그런데 왜 올해 갑자기 연기를 많이 하려는 걸까? “많이 하려고 계획한 건 아니에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후로 제안이 늘었어요. 제 연기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보는 사람들이 바뀐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제 연기를 보고 사람들은 ‘저게 뭐야? 저거 일반인이야? 연기자가 아닌데?’ 이랬는데, 지금은 현실감 있다며 ‘연기 천재, 연기의 신’ 이러더라고요. 이 현상을 나름 분석해본 결과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플랫폼 때문에 사람들이 변한 것 같아요.” 백현진에 대한 연기 평가는 그가 임원급 빌런 역할을 맡기 전후로 나뉜다. 대한민국에서 임원급 빌런을 주도하는 인물은 이경영과 김의성인데, 그들은 새로운 빌런의 등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궁금했다. “안 그래도 제가 최근 맡은 배역 때문에 김의성 형님이 걱정하더군요. 악당으로 지금 위치까지 올라온 사람이 걱정할 수준의 역할이에요. 촬영하고 알았어요. 왜 걱정했는지. 어떤 대사는 진짜 못하겠더라고요. 전달해야 하는 내용을 언어만 바꿔서 하겠다고 했을 정도예요. 너무너무 끔찍한 얘기들이에요. 그 빌런 역할을 하면서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어요.” 백현진 필모그래피에서 빌런이 늘어나고 있다. 빌런 패턴이 발견된다. 백현진은 빌런 연기를 좋아할까? “지난해 개봉한 영화 <십개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긋나긋한 산부인과 의사로 나와요. 솔직히 나긋나긋한 연기가 더 재밌어요. 독립 영화에서는 찌질하고 동네 바보 같은 역할들도 했는데, 그런 역할이 매력적이에요. 제 모습에 더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연기는 몇 년 더 해봐야 언어로 정리될 것 같아요.”



사실 이번 인터뷰의 주제는 백현진이 지금 즐기는 것들이다. 인터뷰의 갈무리에서야 물었다. 그가 즐기는 것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리 다루는 일과 부엌일, 뜨거운 물은 언제나 즐긴다, 붓질도 여전히 즐겁고, 식물 보는 건 점점 더 재밌어진다고 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그의 거실 창가에는 키가 천장까지 닿은 식물들이 나란히 있었다. 백현진의 애정이 느껴졌다. 그 사이로 어항이 있고, 어항에선 구피와 달팽이들이 우리를 지켜봤다. 뜸 들인 뒤 백현진이 말을 이었다. 기계는 까다롭게 좋아하고, 추운 공기도 재밌다고 한다. 그는 최근 영하 17℃를 기록한 날 오랫동안 걸었다. 또 그는 트랜스 상태도 좋아한다. 공연할 때도, 붓질할 때도 연기할 때도 트랜스 상태가 된다고 했다. 그는 말을 정정했다. 그냥 별 생각 없는 상태라고.




ARENA HOMME+ 2021. 02

https://www.smlounge.co.kr/arena/article/47291

매거진의 이전글 인도네시아 스마트 시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