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칼럼 백업

사소함에서 의미를 발견하다

by 조진혁

왜 기발한 생각은 샤워할 때만 떠오르는가? 라고 샤워기에 대고 물어봤다. 그러자 물줄기가 차가웠다가 뜨거웠다 그랬다. 나는 꼭 반드시 무조건 실천에 옮겨야 하는, 인생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나를 슈퍼스타로 만들어줄 수 있는, 성공할 사업 아이디어를 샤워하면서 종종 떠올린다. 그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면 아이디어도 함께 사라진다. 이 무슨 팅커벨의 마법가루 같은 소린가 싶겠지만, 이보다 더 믿기지 않는 건 이런 상황을 수십년 겪고도 나는 기록하는 습관을 갖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샤워 수전에 깃든 요정이 제아무리 내게 행운을 내려줘도 나는 샴푸와 함께 말끔히 씻어낼 뿐이다. 기록하지 않는 내가 밉...미련하다.


중박 정도는 기대해봐도 되겠다 싶은 아이디어는 일상에서 떠오른다. 운전하거나, 점심 먹을 가는 동안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을 때, 주말에 신나게 놀았음에도 내 근황을 궁금해하는 이가 없을 때, 입술이 근질거려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을 때 괜찮은 사업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보다는 대화에 끼어드는 축이다. 쓸데없는 리액션 “오-!, 아 정말?” 이런 소리나 하려다 중박 아이템들을 많이 날렸다. 내가 놓친 아이디어는 하늘 높이 날아가 몽골 초원의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기록 대신 기억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아왔다. 문제는 기억력이 쇠퇴하면서부터다.


고유명사가 잘 떠오르지 않고, 사람 이름도 자주 까먹는다. 차 번호나 계좌번호 같은 숫자들은 더욱 외우기 어렵다. 암기할 의지가 없는 것도 이유다. 휴대폰으로 찍어두면 되는 걸 뭐하러 마음 잡고 집중해서 외우나 싶다. 집중력을 발휘하기에는 의지력도 부족하다. 어쨌든 힘이 없다. 나와 같이 나약하고 게으른 현대인이 즐기는 정신활동 트렌드는 공상문학이다. 내가 사놓은 주식이 이유 없이 오르는 상상. 그럼 강남에 건물을 몇 채를 사야할까? 그 건물 중 하나는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좋은 일에 쓰고 싶다는 공상을 하며 지하철을 탄다.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방을 내어줄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교실을 내어줄까? 또 누가 도움이 필요할까?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몇 개의 아이디어는 휴대폰 메모장에 쓴다.


휴대폰 메모장은 휘발되지 않는 기름 같은 것이다. 새 폰에서도, 컴퓨터에서도 예전에 쓴 메모들은 사라지지 않고 이따금 수면 위로 드러난다. 아이클라우드에서 우연히 전전 여친 사진을 발견할 때처럼, 오래전 내 생각을 마주하는 건 불편하다. 하지만 찬찬히 다시 읽으면 사라진 그때 그 감성이 떠오른다. 첫사랑의 감정이 다시 불러와지지 않듯이, 오래된 기록에 담긴 감성도 다시 느껴지진 않는다. 그래도 유추할 순 있다. “그때 나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구나.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은 청년이었구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기록에 담긴 건 돈을 벌 수 있는 대박 사업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이 다행스럽다. 지금 시대 상황에 맞게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면 분명 쓸만할 것이다. 투자도 없고, 수익도 없겠지만 보람은 있을 거다. 나쁘지 않은 삶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기억을 재현하는 것을 무의식적인 과정으로 묘사한다. 마들렌 케이크의 맛과 차의 향기에서 어린시절을 회생하는 식이다. 감각이 기억을 끄집어 내는 트리거 역할을 하는 셈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해주시던 칼국수맛과 비슷해 어린시절 엄마가 칼국수 끓여주던 순간이 기억나는 것처럼. 감각 역시 메모, 사진, 영상과 같은 기록의 한 형태라 하겠다. 그러니 무엇을 기록해야 한다고 묻는다면, 자신의 삶을 기록하라고 하겠다. 인생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 많이 만져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메모장에 글로 쓴 사고들, 사진으로 찍는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 그림으로만 남겨지는 감각들, 말과 뉘앙스가 온전히 기록된 영상들, 그리고 그것들을 찍고 쓰는 과정 모두 무의식에 기록될 것이다.


기록의 가치는 과거를 재현하는 것에만 있진 않다. 기록은 우리를 미래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내비게이션이 되기도 한다. 대형 뮤지컬 연출가이자 작가를 인터뷰했을 때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란 없는데, 어디서 영감을 받아 극을 쓰냐고 물었더니, 그는 취재라고 답했다. 그는 발로 뛰고, 사람들에게 묻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서 파생된 새로운 이야기를 쫓고, 또 사람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식이다. 취재를 할수록 극에 담길 캐릭터는 많아지고, 각 캐릭터 남긴 이야기가 전체 서사를 완성하는데 큰 도움이되며, 때로는 주요 사건을 완성하기도 한다고 했다. 물론 과거에 취재했던 기록들을 가져와 믹스 앤 매치를 하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극을 만들려면 기록이 필요하고, 그 기록이란 취재하며 만난 사람들이 가진 그들 각자의 기억이다. 영화 감독, 애니메이션 감독 모두 비슷한 소리를 한다. 취재하고, 기록하라고. 그것들이 모이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가보면, 예술가들이 있다. 패션 브랜드 디자이너이자 미술가로 활동하는 한 외국인과 인터뷰에서 그는 두 가지를 휴대한다고 말했다. 라이카 카메라와 휴대폰이다. 항상 사진을 찍는데, 구도를 계산해 찍기 보다는 순간 보이는 것들을 찍는다고 했다. 예를 들면 고층건물 사이로 보이는 유달리 파란 하늘, 아스팔트 웅덩이에 비친 고급차의 질감 같은 것이다. 매일 영감을 필요로 하고, 이미지와 질감을 쫓는 그는 자신의 시선을 모두 기록하려 했다. 휴대폰으로 찍은 이미지만 수백 기가에 이르며, 더 특별한 이미지는 라이카 카메라 찍는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사진들을 다시 보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착안하고 있었다. 이처럼 기록은 일에 영감을 준다. 창의적인 활동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사례를 통해 전략을 세울 수 있게 해주고, 위험을 줄일 수 있게 도와준다.


이번에는 일상으로 가보자. 내게 기록의 힘은 무엇이었나? 나는 무엇에서 힘을 얻고, 의미를 찾나? 이 글을 쓰면서 소셜미디어와 구글포토, 클라우드, 휴대폰 사진 등을 한 바퀴 돌아봤다. 그리고 대부분이 아이들과 아내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뭘 사야할지 아내와 함께 고민했던 유모차 리스트들, 부모님 생신상을 준비하느라 짜놨던 장보기 목록, 결혼식과 신혼여행 비용을 정리한 엑셀, 결혼 전 함께 여행갈때 끊었던 비행기 영수증이 있었다. 내가 기록하지 않았음에도 내 계정으로 기록된 것들. 당시 순간들을 불러오는 트리거 같은 그 기록들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내게 힘이 되는 것. 가족.



모터스라인 2023 vol.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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