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 트러블
"밖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아?"
"글쎄. 뭔 소리? 잘 모르겠는데."
"온수 켤 때마다 쿵쿵 소리가 나는 거 같아."
그러고 보니 싱크대에서 온수를 켤 때마다 집 밖에 있는 보일러실에서 '쿵'하고 뭔가 내려앉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술 취한 사람이 온수를 켤 때마다 타이밍을 맞춰 대문을 뻥하고 걷어차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 일이지. 한겨울 밤 아무리 적막한 동네라고 해도 이 정도면 심한 건데. 얼마나 소리가 크길래 집안에까지 들린담. 온수를 켜고 내리는 테스트를 한 번씩 할 때마다 아내의 목은 5도씩 기울기 시작했고 눈도 2센티씩 점점 커졌다.
"보일러 실에 고양이나 동물 같은 게 있는 거 아닐까? 혹시 뜨거워서 놀라나?"
"문을 안 연지 몇 년은 된 거 같은데... 나가서 확인 좀 해봐."
"그 안에서 고양이가 엄청 커진 거 아냐?"
혹시 뭔가 뛰쳐나오면 어떡하나 계단 밑에 있는 보일러실 문을 긴장하며 열었다. 다행히 고양이도 무엇도 없었다. 그런데 아내 말대로 온수를 켤 대마다 보일러가 쿵하며 거인의 방귀 같은 소리를 냈다. 냄새는 없었다. 가스가 새는 방귀가 아니라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여보세요? 온수 그만 켜도 될 거 같아. 자기가 말한 게 맞아. 고양이는 없어."
다음날 아내가 놀라서 전화를 걸어왔다. 내용을 들어보니 보일러 AS 기사분이 다녀갔다. 보일러가 거인으로 변해 자꾸 방귀를 뀌는 건 가스 압력이 안 맞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러면 맞추면 되지?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가스 노즐이 LPG 용인 것 같다는 거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
"그러니까 우리가 이사 올 때 도시가스가 바로 연결이 안 돼서 LPG 보일러를 쓰다가 나중에 도시가스 연결했잖아. 그러면 거기에 맞는 노즐로 교체해야 했었는데 그걸 안 한 거 같대. 가스 압력이 안 맞아서 소리가 나는 거였는데, 맞추기가 어렵대. 아무튼 그건 별개로 노즐은 당장 교체해야 한대. 그런데 문제는 지금 노즐이 없어서 다음 주에나 다시 오겠대. 어떻게 이렇게 썼냐고 이러다 정말 큰일 난대."
보일러를 뜯어보니 다행히 내부에는 큰 손상이 없었는데 이러다 보일러 자체를 교체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럴 경우 고장 책임은 보일러 제조사에 없다고 선을 그은 상태였다. 다급한 아내의 목소리를 감정해보니 이미 아내 목은 50도쯤, 눈은 10센티쯤 꺾이고 커진 상태였다.
아내의 얼굴이 홀로그램처럼 전화기 너머로 튀어나왔다. 아. 또 도시가스라니. 떠올리기도 싫은 단어, 도시가스. 그걸 또 내 입에 담게 될 줄이야.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4년 전 단독주택을 리모델링을 하며 가장 괴롭고 어려웠던 것이 도시가스 연결이었는데. 그 망령이 이렇게 또 고개를 들다니.
우리 집을 리모델링한 건축사 겸 시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보일러 거인이 큰 방귀를 뀌고 있으며 맞지 않는 노즐 팬티를 입고 있는 잘못된 상황을 설명했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럴 리 없을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보일러 시공사에서 도시가스를 놓으며 제대로 교체를 했을 거라고. 그래. 4년 전 이야기인데 어떻게 다 기억을 하겠어. 다행히 보일러에는 시공표지판이란 노란색 딱지가 붙어있는데, 이곳에서 설치를 책임진 모양이었다. 바로 전화를 했다. 역시 오래전이라 기억이 안 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거였다. 노즐을 안 바꿨다면 보일러가 여태 제대로 돌아갔을 리 없다는 말이었다. 듣고 보니 또 맞는 이야기 같았다. 방귀가 아니라 *를 싸도 벌써 쌌지. 그래도 이렇게 순순히 전화를 내려놓기가 억울했다. 보일러를 시공하고 노즐 교체한 그런 기록 같은 건 없냐고 물었다. 아마 없을 거고 있어도 못 찾을 거란 태연한 답이 돌아왔다.
누구 말이 맞는지 알 길이 없었다. 확실한 건 보일러 거인이 더 큰일을 저지르기 전에 노즐이든 팬티든 갈아줘야 한다는 거였다. 무언가 분했다. 누구 책임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4년 전 일. 오래전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AS 기사가 노즐을 구해 다음 주 최대한 빨리 오기로 했다. 아무튼 더 이상 보일러에서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쿵하고 놀란 가슴을 일단 쓸어내리기로 했다. 그래도 다음 주까지 별일은 없겠지.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러 욕조에 따뜻한 물을 담았다. 반신욕을 하며 음악을 듣는 것이 겨울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리모델링을 하며 반신욕 이야기를 몇 번을 했던가. 그런데 물을 받다 보니 욕조 한쪽에 안보이던 실금이 보였다. 때가 탄 것처럼 검은 줄이 있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얼마 전부터 그랬는데 선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는 거였다. 어, 이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금이 가면 물이 새는 걸 텐데. 이건 또 왜 이러지?
이번엔 욕조가 문제였다. 쿵하고 내려앉은 가슴에 이번엔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건축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