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사람들

ASMR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작

by 봉봉

빙 둘러앉은 심사위원들이 나의 발표를 기다린다. 방통위 제작지원사업 PT. 인사를 하고 자료 첫 장을 열었다.

“사진의 이곳은 인천의 오래된 동네, ‘배다리’라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배가 드나들던 곳이라고 해요. 1년 전, 이 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파트 층간소음도 너무 힘들고, 이곳저곳 전셋집 옮겨다는 것도 지쳐서, 비교적 값이 싼 옛날 동네에 작은 집을 하나 샀습니다. 이곳에 주민으로 살다 보니 동네가 다시 보이더군요. 원도심에는 있는데 신도시에는 없는 것, 바로 골목길입니다….”


음향다큐 골목길 사람들 PT 자료. 골목길 사진은 '9와 숫자들'의 노래 '수도국' 뮤직비디오 스틸 컷이다.


PT 발표를 시작하려다 표지의 사진을 쳐다보며 이렇게 2분을 까먹었다. 사업 발표도 제법 하다 보니 넉살이 붙어서 이제 별소리를 다 하게 된다. ‘골목길 사람들’이란 ASMR 라디오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자리. 이제 남은 시간은 3분. 그 와중에 다시 영화 ‘Roma’의 트레일러 틀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라는 영화입니다. 음향을 좀 더 키워주시죠.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인데, 스토리도 좋지만 사운드, 그러니까 옛 공간의 소리, 추억의 소리에 엄청난 공을 들였습니다. <골목길 사람들>도 이 영화처럼 사운드를 구성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특히 원도심의 ‘소리’로 듣고자 합니다. 사라진 소리는 골목길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처럼 재연하려 합니다.”


영상을 틀어놓고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도 지쳤는지, 말보다 영화에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이제 남은 시간은 2분. 준비된 PT 자료를 넘겨가며 핵심 문장만 어필하기로 했다.


“라디오는 ‘소리’의 매체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데 저는 15년이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라디오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소리로 들려주고자 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떠난 원도심의 소리를 주제에 맞춰 구성하겠습니다. 도시재생, 골목상권, 재개발과 재건축. 파괴되는 것은 건물만이 아닙니다.”


타이머가 30초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말을 무엇으로 해야 하나, 그동안 사운드 콘텐츠를 제작해온 이력과 수상실적으로 어필해야 할까. 순간 헷갈리기 시작하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준비된 PT 자료는 다 보여 주지도 못했다. 피곤한지 제안서에 얼굴을 파묻는 심사위원이 보인다. 취재하는 영상을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겠다, 채집한 소리들을 박물관에 자료로 넘길 예정이다 등등 못다 한 말이 산더미인데, 나도 모르게 또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안개 내린 아침이면 저는 침대에서 인천항 뱃고동 소리를 듣습니다. 1호선 기차가 지나는 소리도 들리고 옥상에 올라가면 옥상만의 소리가 있습니다. 버려지고 낙후한 원도심에는 아직 소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도시재생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우리가 떠나온 골목길, 그곳엔 소리가 살고 있고,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우리 동네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이다. 그동안 쌓아온 사운드 콘텐츠를 집대성할 프로그램을 시작할 예정이다. 제목은 <음향다큐: 골목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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