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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Jul 07. 2023

아무 것도 안하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어느 날 내 책 - 세이프 오브 워터 

거로부터 흐르는 강물일 뿐이다

   단정하게 코트를 입은 한 이용자가 책을 가슴에 감아 안고 걸어온다. 머뭇머뭇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숫자를 적은 쪽지를 내민다. 나는 상호대차로 나갔다 돌아온 책들을 정리하는 중이다. 허리를 펴고 일어나, 마스크 위 반짝이는 맑은 눈에 눈을 맞추고 안경을 벗어 적혀 있는 청구기호를 읽는다. 

    “저, 이 책 좀 찾아주세요.” 영미문학이다. 그중 소설이다. 

    “이 근처에 있지 않을까요?” 

    “그렇죠? 여기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없어서 여쭤보는 거예요.” 

    파란 표지에 괴물하고 여자 그림이 있는 책이라고 했다. 동화책은 아니다. 제목을 물어봤다. 『셰이프 오브 워터』. 핸드폰으로 검색해 표지를 확인했다. 작가는 기예르모 델 토로다. 그런데 있어야 할 곳에서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자료검색 결과에 따르면 분명 ‘대출 가능’하고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없다. 월요일 휴관인 그 도서관은 화요일이 가장 바빴다. 배가를 기다리는 책들이 삼백 권 정도 쌓여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은 서가에 청구기호대로 꽂혀 있지 않으면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된다. 찾으려는 누군가의 의지가 없다면, 우연이라도 홀연히 제때 스스로 나타나지 않으면, 어딘가엔 있다 하더라도 없고, 없어도 없다는 그 사실조차 알 수 없다. 물론 이런 일이 흔치는 않지만 일어나곤 하니, 그리 심각할 건 아니라도, 나는 그저 봉사자일 뿐이라도, 무엇보다 책을 찾아 읽고 싶은 이용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어 미안해진다.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소설인데 시나 희곡, 수필에 가 있을까? 눈이 나빠 잘못 보았을까? 누군가 엉뚱한 데 꽂았을까? 하나하나 살펴 찾는 수밖에 없다. 지켜보던 사서 선생님은 나를 배가 대기 중인 책들로 돌려보냈고 그날 일은 그렇게 흐지부지, 한 주가 지났다.

    궁금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무슨 책이길래 그 사람은 그렇게 열심히 찾았는지, 기예르모 델 토로는 누군지. 2017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면서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영화라 했다. 꽤 유명했을 영화를 나는 전혀 모르고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때 난 뭘 하며 살았길래. 하긴 영화 한 편 보기 힘들어하며 산 지도 오래되긴 했다. 책은 그 영화 원작인가 싶었지만, 영화가 먼저 나온 다음 출판되었다. 

    책에는 영화에 없는 내용이 있다고 책을 찾던 이는 말했다. 그는 혼자서 영미문학 서가를 다 뒤지고 일본 문학 서가를 다 뒤져서 결국 책을 찾아냈고 바로 대출해 갔다고 사서 선생님께 전해 들었다. 그러면 영화라도 한번 볼까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주인공 엘라이자가 꾸는 ‘깊고 부드럽고 따뜻한 꿈’,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물속’ 장면으로 시작한다.      


‘내가 그 이야길 한다면 

정말로 한다면 뭘 말해야 할까

나도 궁금하군

그 시대에 관한 얘길 할까?

얼마나 오래전인지

잘생긴 왕자님이 다스리던 시절 같군

아니면 그곳에 대한 얘길 할까?

그 작은 도시는 바다만 가까웠지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아니면, 어디 보자

그녀에 대한 얘길 할까?

목소리를 잃은 공주

아니면 이 사건들의 진실을 말해줄까?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그 모두를 파괴하려던 괴물에 대한 이야기’    

 

     왕자와 공주를 말하지만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얘기는 아니다. ‘미녀와 야수’에 가깝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어느 인터뷰에서 모델 같은 할리우드 미녀가 아니고 야수가 굳이 사람으로 변신하지 않고서도 사랑이 이루어지는 영화라고 했다. 이들의 사랑을 파괴하려는 또 다른 괴물이 있다. 지독하게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군인인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이다. 영화와 달리 책은 이 스트릭랜드라는 인물로 시작한다. 첫 장 제목은 ‘모든 것의 시작’.     


한국에서 한 일이 족쇄가 되어 무려 12년 동안이나 어쩔 수 없이 호이트 장군과의 관계를 이어왔다. 스트릭랜드는 협박에 의해 끌어온 이 관계를 이제 끝내 버리고 싶었다
     

    리처드 스트릭랜드가 데우스 브랑퀴아라 불리는 괴수를 아마존까지 와서 잡아가려는 이유다.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을 고문하고 괴롭히는 무서운 군인으로만 나올 뿐인데 책에서는 그가 그렇게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이 된 배경과 그의 가정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가 주인공 괴수보다 오히려 더 괴물같이 행동하게 된 이유는 한국에서 일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소련군과 북한군을 죽였다는 대사가 잠깐 지나갈 뿐이었는데 책에서는 여러 번 반복해 ‘한국’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를 붙여 개봉한 것으로 알 수 있듯 영화의 중심은 사랑 이야기다. 책에서는 사랑을 방해하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인물이 보이는 증오, 혐오, 공포의 뿌리를 좀 더 말하고 싶었던 듯 보인다.      


한국에서 호이트의 임무는 남쪽으로 피난하는 수백만 명의 한국인을 돕는 것이었다. 당시 스트릭랜드는 호이트의 보좌를 맡고 있었고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부대가 집결해 있던 영동이라는 곳에 있었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렇게 하듯이, 더욱이 소설이니, 가상지명을 쓸 수도 있을 텐데, 더구나 판타지임에도, ‘한국’이라고 말하고 정확하게 ‘영동’을 가리킨다. 1950년 7월 충북 영동 노근리 사건. 그로부터 12년이 흘렀다고 하니 영화이면서 소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시대적 배경은 1962년 무렵이 된다. 소련이 세계 최초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국가들에 충격을 주었던 해는 1957년, 1962년 10월 미국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는 소련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암살된다. 같은 해 12월 17일 우리나라에선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지금은 2022년이니 60년 혹은 70년 넘는 ‘얼마나 오래전’ 일인지 모른다. 1950년이라고? 내가 전쟁을 겪은 것도 아니고,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1969년에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이 시대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이런 기분이 아니었던가. 창밖으로 지나가는 태풍과 소나기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 밖은 바람에 나뭇가지가 꺾이고 간판이 떨어져 날아가고 개천에 물이 차올라 긴급 안내 방송이 울려도, 내겐 아무 영향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때 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람.

    1950년 6월 한국전쟁, 북한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두 달 만에 전세를 뒤집기까지 대혼돈 시기, 미군 부대가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북한군이 피난민 속에 잠입했다고 주장하며 폭격하고 기관총을 발사해 민간인들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학살당한 이들 속엔 여성과 어린이가 많았다고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스트릭랜드가 지닌 잔혹한 괴물성을 이 사건에서 찾고 있다. 델 토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직접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0.1초 생기다가 이내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 사람들은 억울하지만 이미 죽었고 이제 와 뭘 어떡할 수 있단 말이야? 2004년 시행된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1조에 밝히고 있는 법 제정 목적을 읽어보았다.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인권신장과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 관련 영화나 만화를 찾아보다 노근리 주민이 했다는 말을 읽었다. “미군이 왜 쏴! 빨갱이가 쏘겠지.”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는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1950년 7월 해남, 당시 아기였던 우리 엄마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60년 이상 친어머니를 알지 못한 채 살았다. 해남은 북한 인민군을 몰아내고 주민을 지킨다며 우리 경찰부대가 들어왔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1950년은 그렇게 한 아이에게 너무나 당연한 존재들의 운명을 돌이킬 수 없이 멀리 갈라놓았다. 남겨진 아이는 무엇을 잃어버린지도 몰랐다. 책 『셰이프 오브 워터』는 한국 영동에서 일을 기억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어디에선가 작게 들려오던 속삭임이 끔찍한 비명으로 변했다. 스트릭랜드는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일이 밝혀진다면 전 세계 신문의 1면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죽는 날까지 호이트 장군과 한 편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자부심과 부와 명예로 기억되는, 승리한 선의 역사엔 이런 치명적인 구멍이 있다. 영화 첫 내레이션에서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때 내 귀에선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만남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본 어떤 네티즌의 댓글을 메모해 두었다. ‘자신이 가진 장애를 물고기맨에게서 보고 동질감을 느껴 사랑에 빠진다기에는 너무 그 과정이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미국의 60년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영화가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한국인인 저에게는 큰 감동이 되지 못했던 걸까요. 흥행될 만한 요소(동성애자, 장애인, 흑인, 괴물, 로맨스)들을 버무렸지만 감정 이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는 자기 댓글에 답글을 더한다. ‘추가하자면 요새 동성애, 흑인, 소수자 코드만 들어가면 명작 몰이하는 분위기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답글을 달고 있다. ‘동감합니다. 죄 없는 반려묘 모가지는 왜 뜯어먹는 건가요? 그건 그냥 싸나운 늑대죠. … 소수자 다루는 영화 나오면 표 몰아주기식 영화판은 문제라고 봅니다.’ 이런 댓글도 있었다. ‘게이라는 이유로 거의 평생을 억압받고 차별받고 경멸받아온 자일스가 티브이에 나오는 흑인 인권 운동 뉴스에는 지겹고 듣기 싫다면서 채널을 돌리라는 대사를 하는 거랑 젤다에게는 짧은 명령어만 하던 젤다 남편이 리처드에게는 고분 한 거 보고 트어했어요. 같은 소수자라도 자신에게 해당되는 차별이 아니라면 깊은 관심을 주지 않는 걸 찰나였지만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게 거의 모두 까기 인형 수준.’ 

    나도 보통 한국 사람이라면 이러는 게 “보통”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게 “솔직한” 거지,라고 들 한다. 포털 영화 감상평 맨 윗줄엔 ‘호불호가 갈린다고 해서 봤다’고 적혀 있었다. 용감한 사람이다. 스스로 ‘진보’라 이야기하는 사람도 ‘페미’라는 말엔 좀 격한 감정을 실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며 더욱이 흑인이 아니고 괴물도 아닐뿐더러 로맨스는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이나 K-Drama 판타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일 테니. 우리 아들이, 옆집 엄마가, 동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 특히나 고양이 좋아하는 울 아들이 그러지 않을까? 흥행할 요소라지만, 우리 남편과 아들은 인물 소개만 듣고도 같이 안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자일스가 데우스 브랑퀴아에게 ‘당신도 외로운가?’ 건네는 질문 한 마디에도 쉽게 감정이입이 되던걸. 내가 마치 동성애자이기도 하고 장애인이기도 하면서 흑인 같기도 하고 그래서 괴물인 것만 같다. 그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이 영화는 내게 명작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명작이라 하는 영화판이 나는 참 다행이다 싶다. 동성애자인 듯 보이는 자일스는 억압과 차별을 받고 경멸받았다기보다 억압, 차별, 경멸을 받을 거라는 걸 알기에 자신을 표현 못 한, 행동하지 못했던 사람 아닐까. 말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 엘라이자와 같은 처지. 엘라이자가 데우스 브랑퀴아를 구하는 걸 도와달라고 하자 그는 말한다.      

  우리가 뭔데? 우린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못 해! 그는 인간도 아니잖아.     


나는 앞에 영화 댓글러들이 이름 붙여 가리키고 있는 모든 소수자 같은 존재라기보다 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나를 가리키며 “너 말이야, 너. 아무것도 아닌 애”라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말에 벽을 쾅 두드리며 엘라이자가 말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너무 오래된 시절이어서 왕자님이 있던 때같이 느껴진다는 1960년대, 그 시대는 미국과 소련,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맞선 시대. 한국인이라서 감동이 없었다는 그 댓글러가 책을 읽는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도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는 최전선에서 가장 폭력적인 전쟁을 몸소 겪어낸 것이 대한민국이고 전쟁의 잔인함과 그로 인한 상실을 견뎌낸 장본인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다. 우리는 아직 그 시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데우스 브랑퀴아는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스트릭랜드와 다른 점이다. 상처를 입고 괴물이 된 인간인 스트릭랜드는 증오하고 차별하고 혐오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치유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스트릭랜드라는 인물 속에서도 나는 내 모습을 본다. 명작으로 보든 말든 상관없이 제목은 참 적절하다. 달걀을 삶는 물, 목욕물, 데우스 브랑퀴아를 가두는 물, 데우스 브랑퀴아를 살리는 물, 차창에 매달린 물방울, 퍼붓는 빗줄기, 강물, 그리고 그 물들이 이곳저곳을 흘러 궁극적으로 닿게 될 바다. 인간의 모습, 그러한 인간이 행하는 사랑의 모습, 정해져 있는 건 없다. 각기 변화무쌍한 다른 모습으로 있을 뿐이다. ‘나’의 모습도 마찬가지. 


기예르모 델 토로 ‧ 다니엘 크라우스 지음, 김문주 옮김, 김영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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