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책 -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이건 뭐, 하와이니, 싶은 큰 꽃무늬 파란 원피스. 하늘이 파랗지도 않고, 우산을 들고나가면서, 나는 굳이 이 옷을 입고 있다. 나도 안다. 왠지는 모르지만, 이 옷을 입으면 몸이 더 부해 보인다는 거. 무다리도 감출 수 없다는 거. 날도 덥고, 더우면 원피스가 최고지, 싶어서, 그냥, 입고 싶으니까, 그렇게 입고 지하철을 탄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지하철을 탄다는 게 얼마나 큰 결심인지.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카톡, 카톡, 한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반납이 연체되고 있다고. 옆 동네 도서관 책단비 서비스로 받은 책이어서 지하철역에 있는 대출‧반납 기계로 가야 한다. 연체되는 날짜만큼 이용이 지연될 뿐이지만 그 시간 동안 내 마음속에서 어떤 충동이 일지 모를 일이니 당장 반납하기로 했다. 잊고 있었는데, 이틀 뒤면 이태원의 한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캐서린 오피 개인전도 끝이라니, 이왕 지하철 탄 김에 가 보자.
지하철 문이 열린다. 비가 오는 한낮, 사람도 별로 없어서 앉을자리 많지만, 나는 문 앞에 두 다리를 떡 버티고 선다. 언제든 내릴 수 있고, 무엇보다 그 자리가 바람이 많이 불어 숨쉬기가 좋다. 이태원까지 역이 열 개. 두세 정거장을 자리도 많은데 서서 가는 내가 눈에 띄었나 보다. 한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앉아서 가라, 하고 빈자리를 가리킨다. 나도 아줌마 넉살을 좀 부려 본다. 마스크도 썼겠다, 눈짓으로 고맙다 그러고 괜찮다, 그러면 될 것을.
“어머 신경 써 주시니 너무 감사해요. 근데, 곧 내려요. 여기가 더 시원하기도 하고요.”
“좀 비대해서 그러나?”
아주머니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속으로 적지않이 당황했다. 역시 옷이 문젠가.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호호, 네, 그래서 안 앉아요. 날도 더운데 더 더울까 봐요.” 다시 잘 보니, 몽당 연필 선 같은 몸에 마침표 같은 눈을 한 아주머니. ‘비대하다’는 말은 ‘뚱뚱하다’를 피하려고 고르고 고른 말일 텐데, 왠지 웃음이 났다. 애 가졌냐고 하지 않은 게 어디야, 생각해 보니, 그럼, 나이가 있는데 망측하지 않냐, 싶다. 그래도 나는 ‘비대하다’는 말보다 ‘뚱뚱하다’는 말이 더 편한데. ‘뚱뚱하다’는 그냥 뚱뚱하다는 뜻이지만, ‘비대하다’는, 구조조정을 하든지,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비판, 조금 더 나가면 강압 같은 게 들어 있는 것 같아서다. 뚱뚱한 게 잘못은 아니잖아. 신부님들이 어느 자리에 가서 할 말은 많은데 할 수 없을 때 쓰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시던 게 있다. 성경책을 무작정 펼치는 거다. 그때 보이는 성경 구절이 상황에 딱 맞아떨어질 때가 많다고 한다. 신부님이 아니어도 이런 우연을 계시처럼 여기며 감탄하고 감사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날이 그랬다. 나는 더 우람하게 지하철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다가 이태원에 내려 미술관을 찾아 들어갔다. 아담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안내데스크 너머에서 일하는 직원이 관람객보다 더 많았다.
캐서린 오피의 첫 한국 개인전. 제목은 ‘나의 해안에서 당신의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이다. 1층에는 진한 녹색, 파란색, 보라색 그리고 빨간색 배경으로 인물을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의 위풍당당한 시선과 달리 나는 눈을 맞추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런 나를 사진 속에선 괜찮다고 웃어 주기까지 한다. 르네상스 시대 귀족처럼 앉은 작가 사진도 인상적이다(캐서린이면 여잔데). 안경 낀 둥근 얼굴에 덩치가 정말 컸다. ‘나의 해안에서 당신의 해안으로…’ 전시가 이어지는 2층으로 올라간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눈 깜짝할 사이 나는, 작가가 부산에서 캘리포니아 롱비치까지 타고 갔다는 화물선 위에 서 있다. 걸린 모든 작품 속 절반 위치에 수평선이 펼쳐지고 그 위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담겨 있다. 1층에서 만난 낯선 감정이 2층에서는 그저, 부질없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지금 네가 서 있는 곳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을 하늘과 바다를 나누는 경계선이라 말하지만, 사실 가늠할 수 없이 광대한 공간이니, 너는 그저 생각을 버리고 평안히 바라보기만 하여라, 하는 것 같다. 사람이 없어서 안내데스크에서 봐도 된다고 준 작가 작품집들을 한참 볼 수 있었다. 같은 구도로 바다를 찍은 파스텔 톤 사진들이 있었는데 제목이 ‘Somewhere in the middle’이다. 필름을 사용해 직접 인화하고 보정을 하지 않는 그 작품세계와 철학이 웅대하면서도 섬세해서, 아, 정말 예술가야,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제 잔잔한 물결 위에 떠 있는 배처럼 고요해진다.
난 알록달록한 색깔의 홈드레스를 입을 거야 … 나는 태양이 날 사로잡고 바다가 날 애무하는 그곳에 머무를 거야 … 아카풀코.(38쪽)
다시 지하철을 타고 문 앞에 서서 큰 꽃무늬 원피스 펄럭이며 바람을 맞고 서 있다가, ‘자꾸만 배 위로 말려 올라가는 윗도리’를 (나처럼) 살짝 잡아 내리는, 시누이한테 ‘책을 너무 읽는 건 좋지 않다’는 충고를 들으면서도 ‘책 속으로 도피’하곤 하는 ‘뚱보 아줌마’가 생각났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를 구하자며 캐나다는 영국과 연합군으로 참전한다. 이때 퀘벡주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쪽에 투표했다. 이 퀘벡주 몬트리올 한 서민 동네에서 5월 2일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가 캐나다 인기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처럼 펼쳐지는 캐나다 작가 미셸 트랑블레의 소설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그래, 지금이다. 이 엉뚱한 제목의 책을 읽을 때가 되었다.
처음 제목을 들으면 뚱뚱한 캐릭터가 하나 있는데 옆집 아줌마고 그 아줌마가 아이를 가졌다는데 그래서 뭔가 싶다.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여자고 남자고 모두 웬만하면 뚱뚱하다. 더 뚱뚱하고 조금 풍만한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는 티 루라는 창녀 정도가 말랐을까. 그녀에 이어 살짝 살집 있던 베아트리스가 훗날 이모인 이 티 루처럼 살며 마른 몸매를 유지했다고 하지). 옆 부자 동네 뚱보 사모님도 아니고 또, ‘사제관에서 사제들을 사랑하며 그들 시중을 드는 뚱뚱한 하녀’도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도시 노동자, 그 직업도 사는 모양도 모두 고만고만 들 하다. 이런 동네에, 전쟁에 남자를 보내고 싶지 않은 때문인지 아니면, 길고 혹독하다는 캐나다 겨울 때문인지, 봄기운이 물씬한 5월, 다가오는 여름에 출산 예정인 여자들이 일곱이나 있다. 여섯 명이 이십 대 초반, 첫 아이를 가졌다. 클레르 르미외, 로즈 위메, 가브리엘 조두앵, 제르멘느 로종, 마리 루이즈 브라사르, 로라 카디외가 그들이다. 남편들도 욕쟁이면서 뚱뚱하든, 게으르면서 뚱뚱하든, 꼭 막혀서 뚱뚱하든 한다. 소설 속 표현에 따르면 임신한 여자 중에서 제일 뚱뚱하고 나이도 많은(42세) 사람이 그 ‘옆집 뚱보 아줌마’다. 너무 뚱뚱한데 애까지 가져서 시누이인 알베르틴이 요강도 넣어주고 몸도 씻겨주며 밥도 침대에서 먹어야 할 정도다. 그런데 이 아줌마는 그저 여자라는 뜻의 ‘나나’라는 애칭이 있을 뿐 이름도 없이 ‘뚱보 여자’다. 입 걸고 성격 고약한 시어머니, 남편은 전쟁터로 보내고 딸과 아들을 기르는 시누이, 성 정체성 모호하고 역시 뚱뚱한 시동생과 함께 이미 아들 둘 낳고 인쇄소에서 일하는 남편과 사는 ‘뚱보 여자’. 우리 시어머니 동네 친구분들이 생각났다. 이분들은 ‘도토리’, ‘106호’, ‘백화점’, ‘선생댁’, ‘ㅇㅇ할머니’ …, 이렇게 하지, 서로 이름을 부르시는 적이 없다. 옮긴이가 말하듯 ‘뚱보 아줌마’가 가진 익명성은 소설에서 설명한 대로 먹을 게 부족해 힘든 시기에 뚱뚱하다는 데 대한, 더구나 죽느냐 사느냐 하는 어두운 시기 아이 가지는 생각은 부도덕하다고 하는 비아냥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지지고 볶고 해도 세상 사이좋은 이웃인 우리 동네 사람 같은 정감도 있다.
이 ‘뚱보 여자’ 식구들의 이름엔 다른 동네 사람들과 달리 성이 없다. 성을 알 수 없는 그녀 가족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소소하기 그지없는 인간 군상을 대표한다. 작가는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에 비견되는 ‘로즈와 비올레트 그리고 모브’가 하는 뜨개질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고양이 뒤플래시, 개 고드부까지, 한 코, 한 코씩 엮어 꽈배기 무늬를 교차시키는 듯한 신비로운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나는 작가가 ‘로즈(혹은 비올레트나 모브)’라고 첫 문장을 고쳐 다시 쓰는 것만으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에 놀랐다). 공원에서 놀던 리샤르와 필립 그리고 테레즈, 군인들 돈을 훔쳐 도망치는 메르세데스, 그를 만나려는 베아트리스, 아들 에두아르와 2년 만에 산책하는 빅투아르 할머니, 술집에서 겁쟁이에 게으름뱅이라 놀림받고 자괴감에 달려 나온 뚱보 여자 남편 가브리엘, 해는 뉘엿뉘엿한데 이들이 하나, 둘씩 우연히 만나, 행렬 지어 집으로 돌아올 땐 왠지 뭉클하고, 뚱보 여자가 시어른, 남편 부축으로 처음 침대에서 일어나 식구들 격려받으며 발코니로 나와서 임신한 동네 여자들에게 “이야기 좀 하자”라고 할 땐, 상쾌한 봄밤 공기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뚱보 여자가 멕시코 아카풀코 해변을 꿈꾸는 이유는 그곳에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전쟁 소식이 닿지 않고, 책을 원 없이 큰소리로 읽을 수 있으며, 원하는 만큼 아이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이기에. 남편에게 자장가처럼 들려주는 이야기이지만 분명 자기 자신을 위한 이 상상을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남편 가브리엘에게 ‘언제쯤이 되어야 따로 나가서 살게 될까’ 묻는 그녀는 안다. 지금처럼 사는 한 자기가 해야 할 일들과 자기 아이들을 빼앗기고, 단 10분이라도 자기 남편이랑 단둘이 있을 수 없는 현실을. 나도 시동생, 시누이, 시부모와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뚱보 여자에 ‘부러움, 혐오, 경멸, 존경’ 등 오만가지 감정을 품고 자기는 하녀가 아니라며 투덜대곤 하는 시누이 알베르틴 마음도 이해가 간다. 지금이 1942년도 아니고 캐나다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다시 뚱보 여자를 바라보니, 그가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알겠다. 맘껏 애를 낳아야겠다니, 옛날이니 그렇지, 요즘 누가 이렇게 기를 쓰고 애를 낳으려 하나 싶다가도 뚱보 여자가 존경스럽다. 애 하나 낳기도 버거워 한 나와 달리 애를 많이 낳고 싶고 마흔이 넘어서도 애를 가질 수 있는 그 여자가 부러워서가 아니다. 저 뚱보 여자는 분노하거나 투덜대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당당하다. 애 몸무게가 2톤은 될 거고, 젖 먹이려면 암소를 떼로 사들여야 할 거라는 농담도 무척 좋아하고, 똑똑하고 예쁘게 기를 걱정은 아예 않고, 아기 응석 다 받아줄 거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자신의 것이라면 가난도 두렵지 않은 용기가 있다. “내가 마르셀(알베르틴의 네 살짜리 아들)한테 너무 심하게 대하는 거 같아요?” 하는 시누이 질문에 그녀가 자신에게 퍼붓는 혐오와 경멸의 말들을 복기하지 않고 일장 연설 없이 고대로 되갚아 답해 줄 만큼 현명하기도 하다.
뚱보 여자는 이 아이를 원했고 이 아이가 필요했으며 그리고 그녀는 아름다웠다.(238쪽)
‘나에게 중요한 나의 사람들을 과거 왕실의 귀족들처럼 무게 있게 표현해 주는 것’이 캐서린 오피만의 친구 사랑법이라고 한다. 미셸 트랑블레에게도 그런 위엄 있는 사랑법이 느껴진다. 이 책이 그의 『플라토 몽루아얄 연대기』 첫 권이라니, 이야기가 어떻게 얽히고설키며 무슨 무늬를 만들어 갈지 궁금해진다. 뚱보 아줌마는 아기를 무사히 낳았을까, 젊은 뚱보 아줌마들은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 테레즈의 사랑 이야기가 있을까, 리샤르나 필립은 어떻게 클지, 혀 짧은 소리 하던 마르셀 영혼은 어디로, 빅투아르 할머니는 오래 사실지, 전쟁에 나간 폴은 살아 돌아오는지….
아카풀코를 꿈꾸는 뚱보 아줌마에겐 원주민의 피가 흐른다고 했다. 캐나다 소설이라고 상상 속엔 온통 백인들로 차 있었다. 책 속에 삽입된 옛 사진을 보아도 이야기를 다인종 사회로 상상하기 힘들다. 얼마 전, 역시 캐나다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를 읽고 『핸드메이드 테일』이라는 TV 시리즈를 보았다. 『시녀이야기 그래픽 노블』에서도 주인공 준의 친구 모이라는 백인이었는데 TV시리즈엔 아프리카계로 설정돼 있는 걸 보고, 아 이렇게 상상할 수도 있는 걸, 하고 놀랐던 적이 있다. 뚱보 여자의 아카풀코는 맘껏 책을 읽고 어떤 아이든 낳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무다리여도 좀 부해 보여도 큰 꽃 원피스를 입고 싶으니까 입고 나갔다가 ‘비대하다’는 소리를 들은 뚱뚱한 내게 조금은 더 유연하고 자유로운 아카풀코 같은 상상 세계를 마련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