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무르>>와 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보고
나는 착하다, 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고 그렇게 살려했다. 나이가 들었다는 건 어쩌면, 이번엔 내가 누군가에게, ‘착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되었단 뜻인지도 모르겠다. 가만 생각해 보니 살면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악당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역으로 많은 이야기에서 보는 착한 일을 굳이 내가 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남한테 해만 안 끼치고 살면 돼,라고 하지만 해를 한 번도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건가도 모르겠다. 그러니 착하다는 말은 도무지 나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착하다는 말은 일종 잽(jab) 같은 게 아닐까. 권투에서 재비란 ‘스트레이트로 안면이나 몸통을 가볍게 연타하는 일’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공격을 노리는 기술’이다. 공격을 노리는 기술일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나를 곤란하게 하는 예기치 못한 일들을 방어하는 기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말을 잘 듣거나 내게 친절하게 행동할 때, 아이고 착하다, 엉덩이 톡톡하며 응원한다. 아이들 교육이라곤 하나,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아, 그게 사는 데 유리할 거다, 우리 이렇게 오순도순 서로 도와 잘살아 보자꾸나, 하는 결국, 나를 위한 말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고도 하니 행복이란 게 별 건가. 그렇다면, ‘착하다’는 말은 착하게 욕심 없이 산 사람들을 칭찬하는 말이라기보다 완곡한 명령법, 훈시처럼 쓰이는 게 아닐까 한다. 작든 크든 타인을 정서적으로 지배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부모님, 선생님, 배우자, 가족, 이웃, 친구 등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하는 다정한 말일지라도.
우리 착한 아들이 내려 준 커피가 맛있어서 밤늦게 홀짝홀짝 마시다 잠이 오지 않아서 넷플릭스에서 201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미카엘 하네케 영화 「아무르」를 보게 되었다. 82세 할아버지가 된, 1966년도 영화 「남과 여」의 주인공, 장루이 트랭티냥과 85세 할머니가 된, 1953년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주인공, 에마뉘엘 리바가 음악가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로 출연한다. 제자가 슈베르트 곡들을 연주하는 콘서트에 다녀와서 “프레스토에서 16 분음 대단했지”라 평하는 지적인 안느, 아내 안느의 겉옷을 받아 단정히 걸어놓는 조르주. 여기가 시작이면 좋았을 것을. 영화는 쾅하고 문을 부수는 소리로 시작된다. 건물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소방관들이 들어와 손수건으로, 마스크로, 코를 막고 창문을 열어젖힌다. 카메라는 소방관을 뒤따라 들어가다 성녀 베르나데타처럼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작은 꽃들이 곱게 놓인 흰 베개를 베고 누운 노부인을 발견한다. 아, 이럴 것 같아 안 보고 싶었는데, 노년의 사랑 그런 거면 좋을 텐데 죽음이라니. 이 노부인이 안느다. 안느는 경동맥 관련 이상으로 병원에서 수술받고 돌아왔었다. 경과가 좋지 않았다. 안느는 조르주에게 ‘다시는 병원에 입원시키지 말라’ 한다. 말도 하지 마라, 설명하지 마라, 한마디도 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콘서트 장면서부터 느끼는 건데, 안느는 자신이 보고 싶은 주변을 살피는 데 반해 조르주는 문득문득 그러나 유심히 안느를 살핀다. 그는 자신을 ‘가끔 고약하긴 한데 정말 착하다’고 해주는 안느 말에 미소를 짓는다. 그 말이 좋은가 보다. 그는 평생 착하게 그렇게 살았을 것 같다. 그런 그에게 안느도 지난 삶이 ‘좋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길다’ 한다. 얼마만큼 일도 많고 좋아야 지나온 인생이 길게 느껴질 수 있는지 내 나이론 가늠할 수 없다. 때가 되면 그 기분 알 수 있으려나. 조르주는 안느에게 젊은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한다. 안느는, 이런 얘길 왜 이제야 하냐며 늙어서 이미지 망칠까 걱정이다. 별 얘기도 아니던데. 옛날에 영화를 봤는데 너무 슬퍼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 감정은 기억이 난다고 한다. 보통 부부들 같으면 골백번은 읊어서 그 얘기 또 하느냐 할 만큼 시시콜콜한 거였다. 조르주는 안느에게 아직 하지 않은 얘기가 아주 많다고 한다(부러울 만큼 오래 함께 살았는데도).
이들에게 딸이 있다.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하는 딸도 한참 중년이다. 그도 늙고 있다. 아픈 어머니 문안을 온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릴 때 두 분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 엿듣던 생각이 났어요. 그런 소릴 들으면 안심이 됐어요. 두 분이 여전히 사랑한단 뜻이고 그럼 이혼할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거니까.” 조르주는 대꾸하지 않는다. 조르주의 얘기나 딸의 얘기나 일상적이고 별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 별말 아닌 말들을 자꾸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랑을 나누는 부모님 소리가 안심되려면 평상시에는 불안했다는 말이다. 자기 부부 관계가 불안해 보이지만 아버지 어머니랑 다를 바 없다,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가 더 걱정이다, 두 분 사랑하시니 내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 이렇게 30분은 더 다른 버전으로 바꿔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잔일을 봐주는 이웃 메리 씨 부부는 조르주에게 자꾸 ‘존경스럽다’고 한다. 어찌 들으니, 나 같으면 당신처럼 못할 텐데, 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우리말에 ‘수고하세요’ 랑 같은 말. 그 부부는, 부지런히 일손이 돼주고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라 했지만, 부수고 들어와야 할 만큼 문에 두껍게 걸어놓은 빗장도 몰랐고, 시체가 부패해 냄새가 날 때까지 찾아보지도 않은 셈이다. 이 메리 씨 부부, 간호사, 요양보호사들은 돈으로 산 서비스다. 조르주는 이런 서비스 제공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안느를 아이 취급하고 안느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느를 병원으로, 요양원으로 보내려는 딸도 편치 않다. 그래서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 딸이나 돌봄 서비스나 모두 무심한 감시자일 뿐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돼 있다는 프랑스인데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조르주 그도 치매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지기 전 안느는 조르주에게 다른 사람 앞에서 이미지 버린다고 말조심시키지 않던가. 그도 팔순을 훨씬 넘겨 당장 일어나지 못한대도 이상하지 않고, 마음은 놀라고 급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노인이다. 제목은 아무르, ‘사랑’인데 사랑이 어디 있다는 거지? 있었다는 건가? 있었는데 없었다는 건가? 있어야 한다는 건가?
조르주는 안느가 ‘좋았지’ 그러면 ‘응’한다. 안느가 “아파(mal)!” 소리 지르면 그는 너무 힘들다. 안느는 그랬다.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 그때 조르주는 그런다, 죄책감 없다고. 안느는 사실 죄책감 느끼고 있잖아, 죄책감 느끼는 게 당연하지,라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다’는 말 뒤에 안느가 하지 못한 말은 무엇이 있었을까? 조르주는 안느에게 그동안 하지 않은 마지막 이야기를 한다. 미안하다, 사랑했다, 좋았다, 고마웠다 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 말이나 던져 만든 이야기 같은데(안느가 제자 알렉상드르에게 피아노로 쳐주길 원했던 바가텔처럼) 영화를 다 보고 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얘기는 이랬다. 어릴 때 엄마가 친구 사귀고 좋지 않을까 보낸 캠프가 싫었다, 자기는 운동 안 좋아하는데 찬물에 수영시키고 그랬다, 음식이 특히 형편없었다, 하루는 싫어하는 쌀푸딩을 먹으라기에 안 먹는다, 그랬더니 다 안 먹으면 안 내보낸다 그래 3시간을 있었다, 엄마하고 캠프생활이 좋으면 엽서에 꽃을 그려 보내고 나쁘면 별을 그려 보내기로 했는데 나중에 와보니 온통 별투성이더라, 그게 남아 있지 않아 섭섭하다, 벌 받던 날 열이 40도로 끓어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디프테리아였고 엄마가 들어오지도 못하고 유리창 밖에서 손짓만 할 뿐이었다….
조곤조곤한 이야기에 안느는 안정을 찾는 듯 보인다. 단지 ‘나 여기 있어, 괜찮아’하는 조르주 목소리가 그녀를 안심시킨 걸까? 아니 모르겠다. 당신 오늘 정말 예쁘다는 말에, 뭐 잘못 먹었냐고 대꾸했던 그녀다. 안느는 조르주가 하는 이야기가 생경하기만 할 것 같다. 조르주의 이야기는 내용의 진위보다 그때 느낀 감정을 기억한다. 안느의 사랑은 이 지점에 있었지 않았을까. 조르주가 하는 말, 하는 일이 고약하긴 하지만 그것을 ‘gentil, 사랑스럽게, 귀엽게, 친절하게,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살았던 거다. 안느는 핀잔을 주면서도 좋았을 거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그 안도의 순간, 조르주는 베개로 안느를 질식사시킨다. 안느가 ‘병원에 절대 보내지 말라’ 던 그때 그 말은 안느의 유언이었던 셈인가? 조르주가 한 일은 안느의 유언을 따르는 ‘착한’ 일이었을까? 조르주는 착하게 안느와 약속을 지키고 환영처럼 살아난 안느를 따라 집을 나선다. 딸이 이 빈집으로 걸어 들어오며 영화는 끝난다. 조르주는 어찌 되었을까? 병원이나 양로원으로 들어갔거나, 곧 안느를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딸이 덤덤하게 들어와 혼자 아버지 의자에 앉았던 거겠지. 뿔뿔이, 그렇게 뿔뿔이, 죽고 살고 죽고…. 어쨌든 영화 제목은 「아무르(사랑)」다.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고’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그 누구 손도 잡을 수 없는 그런 경계에 홀로 서야 하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건너 내게서 떠나간 사람들이 생각났다. 시험 준비하느라 가 보지 못하던 내게 몸소 꿈속으로 찾아오셨던 할머니, 혼자 남을 엄마와 일하는 딸내미 아들내미 걱정하던 아빠, 곡기를 끊고 평생 처음 본 뽀얀 얼굴로 가신 시아버지, 병으로 일러도 너무 이르게 가버린 언니, 동생, 친구들…. 그 시간, 힘들다고 찡찡거린 건 오히려 살아 있는 나였다. 끝없는 터널에 갇힌 것 같아도 결국 때는 온다. 안느를 간호하던 조르주도 어쩌면 그런 죽음의 시간, 떠나간 그 사람들처럼 판단했을 터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찮아지는 그 시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수도 없던 눈 깜빡임, 호흡, 의식이 있건 없건 최선을 다해 그 마지막을 소중하게 행사한다. 그런데, 이 모든 노력과 수고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퉁 치듯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문득 그렇게 말하기는 너무 쉬운 것 아닌가 싶어 진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남은 사람에겐 고통과 슬픔이 남는다. 그걸 견디는 건 분명 착한 거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랑이라며 견디라 하는 것은 무심하고 미안한 일이다. 꽤 많은 경우 간병하던 분들이 앓던 분들보다 먼저 떠나가곤 한다. 줄초상이 있는 집도 있다. 인생길 끝을 함께하는 건 떠나는 사람만큼이나 남게 되는 사람도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다.
‘저는 별안간 그 친구가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남의 아들이 아무리 잘나고 출세했어도 부러워한 적이 없는 제가 말예요.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이나 그런 것 말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박완서 단편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3년)에서 형님 전화를 받는 한 여성이 하는 투정 섞인 하소연이다. 화자는 창환이라는 아들을 잃었다. 한 열흘 전 명애라는 친구를 따라 동창네 아들을 문병 갔다. 동창은 뺑소니를 당한 아들을 병구완하고 있었다. 말끝마다 욕이 줄줄이 달리고 악에 받치듯 하는 동창, 어머니 외에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하는 그 아들의 모습을 보고, 화자는 대성통곡했다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는, 사랑이라는 말도 착하다는 말도 모두 남의 것이 돼, 산다는 게 그저 독한 일이기만 한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넘어 혼자 남으면 아무래도 나는 살아낼 자신이 없어 늘 남편보다 먼저 가길 바랐는데 그러면, 사랑하는 착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일 아닌가 싶어 생각이 많아진다. 「아무르」에서 안느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물 마시기를 거부한다. 조르주는 화를 내고 안느의 뺨을 때린다. 거기에 지지 않고 안느도 머금은 물을 뱉어버린다. 내가 안느 입장이 돼 우리 남편이나 아들에게 뺨을 맞을 수 있지, 생각하니 서글퍼지다가도, 박완서 글에서처럼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될 수 있다는 건 몸서리치도록 욕심났다. 「아무르」 감독 하네케는 인간 실체를 생명을 품은 몸이 아닌 영혼이라 하는 것 같다. 박완서가 표현하고 있는 정서와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박완서의 감정에 더 쉽게 동화되고 만다. 남겨진 세상을 처절하게 살아내는 어머니의 눈물이, 결국 정신줄을 놓고야 마는 조르주의 침묵보다 더 와닿는다.
영화 제목인 ‘사랑’이란 뜻의 프랑스어 ‘아무르(amour)’는 라틴어 ‘아모르(amor)가 어원이다. 누군가는 이를 ‘a(부정의 의미) + mor(죽음)’로 보고 ‘죽음에 저항하다’라고도 해석한다. 프랑스어에는 ‘à mort [아 모르]’라는 표현도 있다. 전치사 ‘à’와 ‘죽음’이란 뜻의 ‘mort’가 합친 어구이다. ‘죽을 정도로, 완전히, 극도로’라는 뜻이다. 김동훈은 「고전어휘사전」이라는 EBS 강의 중 ‘왜 사랑하는가 에로스(Eros)’편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당신의 든든한 힘이 되어 주겠습니다’는 뜻이라 끝을 맺고 있다. 이젠 웬만하면 아들한테, 남편한테 ‘착하다’는 말, 하지 말아야겠다. 사랑한다는 말도 신의 이름처럼 무거워진다. 그저 언젠가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남아 내게 ‘착하다’ 하면 그들을 위해 나는 강아지처럼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착하다’는 말을 갚을 길, 시간, 남아 있지 않을 때, ‘고맙다’ 말 대신 한 번 쓸 수 있으면 제일 좋겠다. ‘하느님의 때는 가장 좋은 때’라고 나는 믿는다. 이를 기다리기엔 아마도 조르주는 너무 노쇠하지 않았을까. 세상이 모두 사라지고 한 점으로 남은 자기 자신도 이미 사라지고 없다. 안느 말대로 그렇게 ‘긴’ 삶을 이미 축복처럼 받았지만.
나는 그저 바랄 뿐이다. 그 ‘때’가 되면 세상이 내게 아주 조금만 더 친절하기를. 부디 ‘착하신 예수님’께서 손을 꼭 잡아 주시길.
성녀 베르나데타(라틴어: Sancta Bernadetta, 1844년 1월 7일 - 1879년 4월 16일) 또는 베르나데트 수비루(프랑스어: Bernadette Soubirous)는 프랑스 루르드 출신으로 1858년 2월 11일부터 6월 16일까지 18차례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했다. 1879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한 후, 그녀의 시신은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채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다(프랑스 느베르 애덕의 모후 수녀원 성당에서 보았다).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곳으로 전해지는 루르드는 매년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방문하는 주요 성지다.
바가텔(Bagatelle)은 클래식 음악에서의 피아노를 위한 성격 소품 중의 하나로, 프랑스어로 '사소한 것', '하찮은 것'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