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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전지적 레즈비언 시점

by Radsbos

<정년이> 알아보기

# 여성국극이란?

1948년, 국악계의 여성 예술가들이 여성 착취와 성 위계를 벗어나기 위해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였다. 그들은 <옥중화>라는 작품으로 시작하여 오직 여성들만 출연하는 창극을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여성국극이다.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여성국극과 그 배우들은 요즘의 아이돌과 같은 인기를 누렸다. 6.25 전쟁이라는 힘든 시기임에도 공연장은 늘 만석이었고, 특히 혈서를 쓰고 가상 결혼식을 올릴 정도로 남역 배우들을 향한 여성 관객들의 사랑이 엄청났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국극단의 인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텔레비전과 영화의 등장과 함께 다소 고루한 장르인 국극이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살 수 없었다고 하지만, 사실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국악계가, 오직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국극단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돈을 번다는 것을 시기하고 무시했다는 데에도 여성국극단의 존립이 어려웠던 이유가 있다. 또한 공연하는 주체는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재정을 관리하던 사업부는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업부의 비리와 부패로 재정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여성국극단이 더 이상 운영될 수 없었다고 알려지기도 한다.


# <정년이> 줄거리

웹툰 <정년이>는 여성국극단인 매란국극단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주인공 정년의 성장을 다룬 이야기이다. 주인공 정년은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목포에서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과거에 실력이

엄청났던 소리꾼으로 추정되는 어머니에게 재능을 물려받은 정년은 떼돈을 벌겠다는 포부 하나로 집을 떠나 목포로 순회공연을 온 매란국극단 트럭에 몰래 올라탄다. 매란국극단 단장은 국극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정년을 쫓아내려고 했으나, 매란국극단의 간판 남역 배우인 옥경이 본인 아래 연구생으로 정년을 들인다. 한편 매란국극단 연구생 조장이자 에이스 영서는 유명한 성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국극으로 성공해 국악인으로서 가족들의 인정을 받고자 한다. 하지만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기공연에선 항상 엑스트라밖에 맡지 못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등장한 정년에게 선배들을 비롯한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자 영서는 못마땅함을 느낀다. 영서와 정년은 가족의 인정과 돈이라는 각자의 목적 아래 최고의 남역 배우가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성장한다.



영서와 정년의 경쟁 관계

아직 많은 서사가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정년과 영서의 관계를 명료하게 정의할 수는 없으나, 굳이 정의하자면 라이벌 관계이다. 두 사람 모두 국극에 대한 열정과 야망이 있고, 승부욕 또한 무척 강하다. 매란국극단에서 이미 유망주로 여겨지는 영서, 그리고 어느 날 혜성같이 등장하여 국극단의 주요 인물들(도앵, 옥경 등)의 이목을 집중시킨 정년. 이 둘은 국극의 주연 자리, 아니 어떻게 보면 ‘국극’ 그 자체를 하나의 가치이자 지향점, 목표로 두고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나한테 배우고 싶다고? 미안한데, 난 네 선생도 엄마도 아니야.


처음 매란국극단에 들어가 서툴기만 했던 정년, 그리고 그런 정년에게 소리 시범을 보인 영서. 영서의 뛰어난 실력에 정년은 우호적으로 다가가지만, 영서는 적대감 가득한 모습을 보인다.


저 화려한 무대가 다 영서 쟈를 위해 있는 것 같애야.
나도 무대 위에서 허영서 같이 빛나고 싶어...!


영서의 무대를 보며 정년은 국극에 대한 열망과 애정이 깊어진다. 영서와 같이 되고 싶다는 동경과 선망이, 돈밖에 모르던 정년을 국극을 향한 갈증에 불타게 만든 것이다.


윤정년은 잘했어.


연구생 극 ‘춘향전’에서 몇몇 연구생들은 ‘방자’ 역할을 맡은 정년을 골탕 먹이기 위해 정년의 소품에 수작을 부려 둔다. 이 때문에 정년은 공연 중 큰 위기를 맞이하는데. 하지만 이런 위기를 의연히 넘기고 훌륭히 연기해낸 정년. 이를 본 후, 영서는 자신에게 다가와 정년을 험담하는 연구생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한다. 내 무대를 망치는 녀석은 가만두지 않겠어. 그리고, 윤정년은 잘했어.


너한테서 어떻게 무대를 뺏냐잉.
무대에 살림 차리고 싶은 애처럼 연기허는디.


정년은 어느 날 영서가 매란국극단 규칙을 어기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이를 단장에게 일러바치지 않는 정년. 영서는 왜 자신을 고발하지 않았는지 정년을 추궁한다. 정년은 영서에게서 무대를 뺏을 마음이 없다.


그러니까 돌아와. 여기선 백날 있어봤자 방자 못한다고.


어떠한 사건으로 매란국극단을 나와 다른 길을 걷게 된 정년. 영서는 정년에게 찾아와 다시 돌아오라 말한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어쩌면 서로의 무대가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른다.


정년과 영서의 경쟁 관계는 기존의 ‘여적여’ 프레임 속 여성 간 경쟁 관계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1. 남성 영향력의 부재

정년과 영서의 경쟁 관계는 남성에 의해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 여성끼리 경쟁을 하는데 그 이유가 남성이라면? 남성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은 여성에게 있어 실로 의미 없는 경쟁이다.

남성을 사이에 둔 여성끼리의 경쟁 서사는 이미 사회에 만연한데, 이는 여성이 여성을 실제적, 잠정적 ‘연적’으로만 보게 하며, 여성끼리 연대하고 사랑할 기회를 앗아간다. 또한, 가부장제 안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사랑은 실제로 여성 착취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남성의 사랑을 얻기 위해 여성과 대립하는 구도는 여성 착취를 더욱 공고히 한다. 여성 관계 안에서 남성 영향력, 즉 남성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굉장히 큰 함의를 가진다.


2. 생산적 목표

여성들끼리 경쟁을 하는 콘텐츠는 사실 굉장히 많다. 미스코리아 대회와 같은 맥락으로 말이다. 여성 간의 경쟁에서는 목표가 무엇인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여성 착취를 공고히 하는 산물을 뽐내며 누가 더 ‘사회적 여성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경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상적인 여성 간 경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성들은 생산적 목표를 두고 경쟁하는 여성 관계를 많이 접하지 못해왔다. 그러나 <정년이>는 커리어라는, 아주 생산적이고 실제적인 목표를 두고 경쟁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3. 승부 과정의 공정함

여성끼리 경쟁을 할 때에도 물론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한다. 무척 야비한 인물도 있을 수 있고, 공정하지 않은 절차로 어떻게든 야망을 이루려는 인물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쟁은 여태껏 지나치게 편향된 방향으로 프레임화되어왔다. 편향된 여성 간 경쟁의 예시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경쟁 관계에 있는 라이벌이 뒤에서 몰래 주인공의 무대 의상을 찢는다거나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는 등의 기존의 서사를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승부 과정에서의 공정함을 보여주는 여성 간 경쟁 관계가 무척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건강한 여성 간 라이벌 관계를 적절히 보여주는 <정년이>의 전개는 우리가 그들의 갈등에 불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흥미진진하게 이들의 승부를 지켜볼 수 있게 한다.



당신이 <정년이>를 봐야 하는 이유

<정년이>에는 다양한 외형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신체는 기형적이고 성적 대상화되어 왔던 기존의 표현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외모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와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사투리 쓰는 여성은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에 지방 출신이라는 또 다른 소수자성이 동반된다. 그렇기에 남성들과는 달리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사투리를 고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는데, <정년이>의 주인공 정년은 정석적인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이처럼 다양한 매체와 콘텐츠에서 사투리를 쓰는 여성이 많이 노출될수록 여성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사투리를 고쳐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직까지도 단순히 외형과 행동으로 여성성과 남성성이 구분되고, 여성성이 열등하고 나약한 것으로 취급되는 우리 사회에 <정년이>는 ‘남자 되고 여자 됨이 참 가소로워’라고 말하며 이러한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여성의 이야기는 그동안 남성 중심 서사에 밀려 배제되어 왔다. 여성 주연, 여성 조연, 여성 악역, 모든 사건의 중심에 여성이 존재하고, 여성들끼리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대립과 조화를 반복하는 이야기. 우리는 이러한 여성 중심의 서사를 여태까지 무의식중에 갈망해왔을 것이다. <정년이>는 오래 지속되어 온 우리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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