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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sbos Feb 23. 2021

레즈비언, 연애하지 않아도 괜찮아 #3

적당한 거리가 좋아요

  사람들은 흔히 레즈비언이라면 당연히 연애를 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여자와 사귈 생각이 없다거나,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이 딱히 없다고 하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받기 일쑤다. 그러나 여기, 연애하지 않으면서도 여자들과 애정을 주고받고, 다양한 관계의 즐거움을 누리고, 여성 연대를 이어가는 “비연애비언”들이 있다.




적당한 거리가 좋아요ㅣ튜드


| 원래부터 연애에 관심이 없었나?

  예전에는 짝사랑을 많이 했다. 연애가 나에게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딱히 할 생각이 없다.


| 연애할 생각이 없어진 이유가 있는지?

  작년까지만 해도 이상화가 심했다. 복잡한 생각 끝에 내가 이상화를 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이상화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누군가와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더라.


| 이상화가 무엇인지 조금 더 이야기해달라.

  어떤 사람을 실제보다 훨씬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너무 매력적이고 완벽해 보였다. 하루 중 대부분을 그 사람을 생각하는 데 썼다. 로맨스에 세뇌당해 그 감정과 관계가 더 낭만적이길 바랐던 것 같다. 굳이 없는 감정도 만들어냈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나 자신이 싫어졌다. 상대가 좋아할 것 같은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집중하니까, 괴로웠다.


| 나도 그래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굉장히 흔한 일인 것 같은데 어떻게 사람을 이상화하는 걸 멈출 수 있었나? 이상화에서 벗어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나?

  열심히 생각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나는 그냥 나를 좋아하는 거였다. 내가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상대의 모습이 알고 보니 내가 좋아하던 나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상대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감정이 깊어졌다. 상대에게 마음을 기울일 때도 나에게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배려했다. 결국 나는 그냥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보다 나같은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았다. 이상화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나니 거기서 벗어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 변화가 금방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과도기는 없었는지

  이상화에서 막 벗어났을 때는 그 반발심이 심했다. 상대를 이상화하는 것을 결핍이나 망상으로 여겼다. 이젠 다시는 그런 역동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직관적인 예감에 씁쓸하기도 했다. 마약하다가 안 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고 생각했다. 동시에 불건강했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에 적응이 되었을 무렵, 심리학 책을 읽다가 이상화가 보편적인 현상인 것을 알게 되었다. 관계를 향한 긍정적인 착각이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했다. 이상화가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보다 차분하게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은 행복을 위해 자신의 통제하에 이상화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모르고 온몸을 던져 빠져드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 그간 관계를 많이 고민해온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 여자들을 만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지금은 전체적으로 톤다운된 느낌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 모임을 통해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고 있다.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거리를 두는 것이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잘 맞거나, 관심사가 비슷해서 더 친밀해지는 관계도 물론 있다. 소수의 관계가 고착되면, 관계가 망가졌을 때 상실감도 크기 때문에 주의할 뿐이다.


| 이전에 비해 관계나 삶이 많이 변한 것 같다. 지금에 만족하나?

  그렇다. 우선 누군가와 너무 가까이 관계를 맺는 것에서 오는 피로감을 줄이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서로 도울 땐 돕고, 많은 것을 함께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속한 모임 내에서 성애가 크게 강조되지 않고, 비연애를 방해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가치관을 유지하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다른 집단에 소속될 때보다, 래디컬 모임에 있을 때 오는 기본적인 편안함과 안정감 덕분에 개별적인 관계에서 이상화를 통해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적어진 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소속된 집단에 퍼져있는 분위기에서 오는 안전함이 나를 더욱 온전하게 만든다. 발전을 추구하는 분위기와 서로를 향한 기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다양한 소모임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도 아주 만족스럽다.


| 이야기를 해본 소감이 어떤가?

  여러 가지 생각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예전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빈도도 현저히 줄어들었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도 그냥 두면 알아서 사라진다. 주변 래디컬 친구들이 연애를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행복을 빌어준다. 비교적 건강한 관계를 맺을 것 같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필요할 때 연애할지도 모른다. 예전보다는 훨씬 건강한 관계를 맺을 것 같아 같은 상황에서도 달라질 내 반응이 기대되기도 한다.




에디터 | 올리브

디자인 | 자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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