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레즈비언이라면 당연히 연애를 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여자와 사귈 생각이 없다거나,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이 딱히 없다고 하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받기 일쑤다. 그러나 여기, 연애하지 않으면서도 여자들과 애정을 주고받고, 다양한 관계의 즐거움을 누리고, 여성 연대를 이어가는 “비연애비언”들이 있다.
흐르는 대로 두고 싶어요ㅣ자몽
| 연인과 친구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직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 이성애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고, 더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연인과 친구 사이에 다른 감정의 결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의 관계망 속에서 연인과 친구가 다소 다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한때 비연애주의자였다고?
과거 남성과 했던 연애는 낮은 자존감과 가스라이팅 속에서 나 자신을 갉아먹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그 관계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웠고 결국 연애를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독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며 비연애를 다짐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여성과 다른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자존감도 회복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자 연애에 대한 생각도 점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연애와 비연애라는 이분법적 선택지에서 벗어나 생각을 좀 더 유연하게 확장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 연애를 향한 생각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계기가 있었는지?
연애를 향한 긍정적인 관점을 갖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이성애로부터의 탈출'이었다. 페미니즘을 더 알아가고 비판적인 시각을 기르면서 과거에 지양하던 연애의 문제는 가부장제를 답습하는 이성애 구조에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이후 그 구조 속에서 내가 지향하는 연애가 근본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한 뒤 일명 ‘혐애’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성애로부터의 탈출은 내가 사랑하던 여성들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 상상만 해오던 관계성 혹은 반대로 상상도 못했던 관계들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다.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지향하는 바를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쌓여가면서, 굳이 나를 비연애주의자로 정의하지는 않게 되었다.
| 새로운 관계를 향한 기대감도 생겼을 것 같은데?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과의 연애에 더 특별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성애에서 탈출했다는 것 자체가 현 사회가 주입한 과대 포장된 연애와 완전히 결별했다는 뜻이고, 그 문화를 여성과 답습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이 더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존재하도록 두고 싶은 마음인 듯하다. 본래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깊은 교감을 나누며 살아가는 편이기에, 내 모습 이대로 더 많은 여자들과 건강하게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
| 이미 여성과 각별한 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있다고?
고등학교 친구와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었었다. 몇 년 간 함께 살기도 했기에 서로가 서로에 관해 모르는 부분이 없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항상 서로가 있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계획하는 미래에는 언제나 상대가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관계였다.
그와 진솔한 마음을 주고 받으면서,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내 편이 있다면 인생을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만일 이 관계에 끝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관계를 직접 경험한 것만으로 나의 마음, 감정,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관계성 등의 깊이와 넓이가 확장되었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는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가?
요즘은 각자 온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누군가와 공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 각자가 스스로 완전하지 못할 때 종종 그 빈 부분을 상대로 채우고자 하는 파괴적인 관계로 변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힘들 때 도움을 주고받더라도 각자의 자아를 상대에게 의탁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집중함과 동시에 다른 여성에 관한 고민을 버려두지 않는, 점차 발전하고 고여있지 않고 흘러가는 관계였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