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지문을 읽어내는 법

고통의 문장을 해석하는 세 가지 시선

살다 보면 도저히 밑줄을 칠 수 없을 만큼 구겨진 페이지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필 나일까"라는 날카로운 질문이 심장을 찔러서,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는 그런 먹먹한 순간들 말이에요. 음... 사실 저도 그럴 때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바빴던 것 같아요. "동행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왜 제 삶은 이 모양인가요?" 하고 말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삶이라는 건 일어나는 사건 그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읽어내느냐'는 해석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해석을 내려놓고 그분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가깝겠죠.



좁은 쇠틀 안에서 발견한 무한한 자유


70년 넘게 '철의 폐'라는 차가운 금속통 안에 갇혀 살았던 폴 알렉산더를 떠올려 봅니다. 스스로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릴 수밖에 없던 그 좁은 통 안에서, 그는 도대체 어떤 세상을 보았을까요? 남들이 보기엔 '갇힌 삶'이었겠지만, 그는 그 안에서 변호사가 되었고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단절'이 아닌, 세상을 향한 '새로운 통로'로 해석했더라고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 노란색 기계를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데, 그는 그 안에서 신의 다정한 숨결을 읽어내고 있었던 거죠. "내가 숨 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숨 쉬게 하신다"는 그 고백이 얼마나 묵직하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절망의 물음표를 사명의 느낌표로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었던 닉 부이치치도 마찬가지예요. 그가 어린 시절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만드셨나요?"라는 절망의 끝에서 "팔다리가 없기에 전 세계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넘어갔을 때, 그의 삶은 더 이상 장애라는 틀에 갇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상황은 그대로였지만, '해석의 눈'이 열리자 비극은 사명이 된 셈입니다. 팔다리가 없다는 결핍이 오히려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 거죠. 아, 이게 정말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국 동행이란 내 결핍 속에 숨겨진 그분의 계획을 발견하는 일인 것 같아요.



흉터 너머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제가 참 좋아하는 이지선 교수님 이야기... 전신 화상이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이 새롭게 빚으신 지선이'로 해석해냈습니다.


사고 이전의 예뻤던 얼굴로 돌아가는 것보다, 지금 이 모습으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말하는 그 눈빛. 그 눈빛은 정말이지... 하나님과 완벽하게 마음을 합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투명함인 것 같아요. 그녀에게 사고는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였습니다.



동행, 같은 곳을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뭘까요?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를 했다는 게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의 비극 위에 겹쳐진 '하나님의 지문'을 찾아냈다는 거예요. "아, 이 아픔이 나를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라, 그분의 더 깊은 마음으로 나를 초대하시는 거구나"라고 말이죠.


이렇게 사건의 의미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게 됩니다. 동행은 손을 잡고 걷는 물리적인 상태라기보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의미를 공유하는 '마음의 상태'니까요.


오늘 여러분의 하루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나요? 혹시 "도대체 왜!"라는 물음표가 마음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 잠시만 숨을 고르고, 그분의 시선을 빌려 내 삶의 구겨진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그 구겨진 자국이, 사실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가장 절절한 사랑의 메시지일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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